2022년 11월 5일
어제 너무 많이 먹은 게 화근이었다. 모처럼 만난 한국인들에 대한 익숙함 때문이었는지 새벽까지 안주와 맥주를 위에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누웠건만 속이 메슥거렸다. 결국 나는 밤새 토를 하고, 위를 게워내야만 했다. 소화제가 있긴 했지만, 술을 먹은 상태에서 먹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지가 되지 못했다.
한인 조식은 8시 30분쯤에 제공되었다. 먼저 일어난 Y는 나를 깨웠으나 밤새 토를 해서 위를 비웠던 나는 조식을 거부했다. 이내 문 밖으로 들리는 목소리. 한번 더 물어봐달라는 사장님의 요청이었다. 사장님은 사람 수대로 정갈하게 조식을 만들어놓으셨고, 이런 호의를 거절하기 힘든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문 밖을 나섰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흰쌀과 된장국, 계란말이, 오이김치. 사장님의 정성을 봐서 한 입만 먹어야지라는 의도와 다르게 남김없이 먹었다. 따뜻한 밥알과 칼칼한 국 한 숟갈은 허한 속을 든든히 채워주었다. 한국인은 밥심이다.
어제 다소 바람이 많이 불어 추웠던 날씨와 달리 오늘의 바르셀로나는 쇼핑하기 적당한 날이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카탈루냐 광장을 활보했다.
스페인 역시 포르투갈과 마찬가지로 일요일에는 많은 가게가 문을 닫는다. 그래서 우리는 사려고 했던 모든 기념품들을 오늘 안에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스페인 하면 올리브. 전 세계에서 가장 올리브가 많이 생산되는 나라답게 올리브와 관련된 많은 제품들이 인기가 많다. 조식을 먹으며 민박집 사장님이 추천해주신 La Chinata는 합리적인 가격과 질 좋은 상품들로 유명한 브랜드였다. 친절한 직원은 우리에게 여러 올리브 오일, 소스에 찍어먹을 수 있도록 테스트 빵을 건넸다. 어떤 지역에서 생산된 올리브냐에 따라 달라지는 맛과 내음. 특히나 트러플 향은 익히 들은 명성답게 깊은 풍미가 느껴졌다. 고심해서 고른 트러플 오일과 트러플 발사믹 소스는 지금도 우리 가족의 식탁을 책임지고 있다.
그다음 구매 리스트는 와인이었다. 여행 오기 전 할아버지는 스페인의 최고 좋은 와인을 사 와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마침 민박집 사장님은 '마츠'라는 브랜드의 할아버지 버전을 추천해주셨다. 마츠에는 청년, 중장년, 노년 3개의 버전이 있다. 그중에서도 el viejo(노인)은 스페인에서도 쉽게 구하기 힘든 와인이었는데 수령 100년 이상된 고목에서만 수확한 포도로 만들어진다.
때마침 지나가다 들린 한 와인셀러에 el viejo가 있었는데 잉글레스 백화점에서도 판매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매를 보류했다. 그러나 백화점에서 판매되는 와인의 가격은 전문 와인 셀러보다 비쌌다.(tax free를 고려해도 비싼 편이다.) 결국 다시 와인셀러로 돌아왔다. 직원에게 Una(스페인어로 '하나')를 외쳤을 뿐인데 그 직원은 나를 기억하는 모양이었는지 빠르게 el viejo 하나를 꺼내왔다.
이후에 할아버지와 함께 맛 본 el viejo는 단맛보다 떫은맛이 강한 레드 와인이었다. 평소 소주를 사랑하시고 알코올의 독한 맛을 좋아하시는 할아버지의 입맛에 걸맞았다. 할아버지 냉장고의 한구석에는 아직까지도 내가 사드린 이 와인이 보관되어 있다.
잠시 휴식을 취하겠다는 Y는 숙소에 있고, 나는 급히 ZARA에 왔다. 지난번 세비야에서 입어보았던 검은색 벨벳 드레스를 사야겠다는 일념에서였다. 바르셀로나에도 여러 개의 ZARA 매장이 있지만, 숙소 바로 근처 있는 이 지점은 굉장히 화려한 내부를 자랑했다.
ZARA를 매번 방문해서 느끼는 점은 사이즈가 너무 크다는 것. 아무리 서양인의 키에 맞춘 거라지만 모델만 소화 가능할 것 같은 기다란 옷가지에 괜한 반발심이 느껴졌다. 실질적으로 남유럽 사람들은 키가 그렇게 크지 않다. 오히려 스페인을 여행 온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훨씬 큰 편이다. 그들 속에 걸어 다니니 한국에서 큰 키에 속하는 내가 유럽에 와서는 새삼 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위화감. 딱 그 감정이었다.
빠르게 옷을 구매하고, 돌아온 숙소에는 어젯밤 맥줏집에서 만난 직장인 남자(a.k.a 과장님)가 휴식을 취하고 계셨다. 오늘 있을 바르셀로나 축구 경기 관람을 위해 따뜻한 패딩을 챙겨 입고, 나갈 채비를 하였다.
과장님 : 어디 가세요?
나 : 축구 경기 보러 가요!
과장님 : 오늘 축구해요??? 누 캄프?? 한국에서 찾아봤을 때는 경기가 없었던 것 같은데...
나 : 네! 오늘 알메리아랑 떠요.
과장님 : 재미있겠다... 잘 보고 오세요!
사실 내가 바르셀로나에서 제일 기대했던 경험은 FC 바르셀로나 축구 직관이었다. 휴학을 하고 해외축구를 보는 재미에 빠져 하루의 마무리를 축구로 끝내곤 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여행 일정 안에 경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카페에서 축구 동행을 구해 티켓을 끊었다. 때마침 타이밍 좋게 핼로윈을 맞아 40% 할인을 진행했다. 그 말인즉슨 안 보면 손해인 게임!
뒤늦게 축구 티켓을 구매한 Y와 축구를 보기 전 저녁을 먹으러 Bacoa에 갔다. Bacoa는 수제 햄버거 브랜드인데 도시 곳곳에 매장이 많다.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BTS 노래는 여기가 한국인지 스페인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 흔들어도 나오지 않는 케첩통 빼곤 모든 게 좋았던 식사를 마치고 메트로로 향했다.
카탈루냐 광장에서 캄프 누 경기장까지 가는 길은 여러 방법이 있지만, 메트로를 타면 빠르게 한 번에 도착 가능하다. 메트로 안에는 벌써부터 축구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많았다. 이후에는 그들만 따라가면 무사히 경기장에 도착한다.
경기 시작 전임에도 벌써부터 팬들은 레반도프스키의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활보하였다. 사실 이번 직관에서 보고 싶었던 선수는 딱 2명이었다. 레반도프스키와 가비. 레반도프스키는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이미 수많은 리그에서 득점왕을 받은 세계 최고의 공격수이다. 나는 그의 깔끔하고, 담백한 플레이 스타일을 좋아한다. 인성마저도 훌륭하다! 오늘의 활약을 기대하며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입구였다.
Access 9번 안에는 공차기 체험 부스가 운영되고 있었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FC 바르셀로나 기념품샵이 위치해있다.
샵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양한 스포츠 용품과 소품들이 판매되고 있다. 규모도 꽤 크고 보는 재미가 있지만, 가격은 썩 유쾌하지 않다.
기념품샵 구석에 위치한 포토존. 바르샤가 2015년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했을 때의 모습이 담겨 있다. 메시, 네이마르, 수아레스 등 지금도 유명한 스타들의 모습은 다소 앳되어 보였다. 메시가 없는 바르샤를 구경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아쉽게 느껴졌다.
경기 시작 시간은 9시. 8시 가까이 쯤 돼서야 경기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내 좌석은 2층 코너였는데 의자가 너무 많아 자리를 찾는 것이 힘들었다. 10여분을 헤매다가 드디어 찾은 내 자리. 이후 만난 동행 분과 잠깐의 인사를 나누고 경기 시작을 기다렸다.
카탈루냐 지방(현재 바르셀로나 지역)은 역사적으로 카스티야 지방과 사이가 좋지 못하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카탈루냐 사람들은 스페인과의 분리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국가가 나올 때 카탈루냐 국기를 드는 사람들의 결연한 모습에서 그들의 염원을 확인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진짜 독립하는 게 나을 듯싶다.
내 옆자리의 남자분은 자신의 가족들과 같이 앉고 싶다며 나에게 자리 이동을 부탁했다. 다소 찜찜했지만, 자리를 옮겼다. 이후 경기가 시작되고, 그제야 옆자리의 남자분은 진짜 광기를 드러냈다. 축구에 진심인 그와 그의 옆에 있는 아이 덕분에 다소 산만하게 경기를 관람해야만 했지만, 그 나름의 재미도 있었다.
전반전, 내가 좋아하는 레반도프스키가 PK를 찰 기회를 얻었다. 당연히 성공할 줄 알고 카메라를 들었지만, 예상외로 실패. 아쉬웠다. 이외의 경기시간에서는 위협적인 장면이 몇 차례 나왔지만, 골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15분의 휴식시간을 가지고, 다시 들어가게 되는 후반전. 잠시 어디 갔다 온 옆자리 광기남과 아이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다.
아이(초등학생으로 추정) : 아리가또.
나 : ???? No. Not 아리가또.
염색한 머리 색깔 때문에 아이는 내가 일본인인 줄 알았나 보다. 내가 단호한 어투로 대답을 하자 광기남과 아이는 머쓱한 눈치를 보였다. 고의는 아니었겠지만, 인종차별적으로 들렸다. 내가 예민하게 구는 걸 수도 있고, 아이에게는 아는 동양의 감사 표현이 그것뿐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했을 때 내가 그들에게 Merci(프랑스어로 '감사합니다')를 말했다면 어땠을까? 출신 국가를 묻지 않고 지례짐작으로 어설픈 단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차라리 공용어인 영어를 쓰는 게 훨씬 바람직한 태도일 터. 그러나 상대는 어린아이였고, 그 점을 고려해 꾹 참고 경기에 집중하였다.
후반전이 시작되고 바르샤는 2골을 넣었다. 열기는 후끈 달아올라 어느새 바르셀로나의 응원가도 귀에 익었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은 연신 한 명의 응원가를 외쳤다. 제라르 피케, 바르셀로나 레전드 수비수. 인터넷에 찾아보니 오늘이 피케가 캄프 누에서 뛰는 마지막 날이었다. 한마디로 은퇴식.
사람들은 피케를 끊임없이 외쳤고, 피케가 교체 아웃할 때쯤에는 흥분한 관중이 경기장에 난입하기도 하였다. tv에서 보기만 하는 장면을 실제로 보니 약간은 얼떨떨하고, 웃겼던 것 같다.
경기는 2:0으로 바르샤의 승리로 끝이 났다. 개인적으로 경기 내용보다 경기 후의 피케 은퇴식이 더 재미있었다. 선수와 코치의 헹가래, 활약상 영상, 단독 소감 발표, 그에게 존경을 표하는 관중들의 무수한 플래시 세리머니. 카탈루냐에서 나고 자라서 오랜 기간 바르샤를 위해 달렸던 그가 울컥하는 모습을 보이자 괜스레 코가 시큰해졌다. 누군가 나에게 축구를 좋아한다는 이유를 물으면 망설임 없이 선수들의 열정 때문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달려 나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나의 인생에서 무언가에 미쳐 온 힘을 다해 쏟은 적이 있는지를 반문하게 된다. 그 진한 감동과 여운은 이루 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