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ar ming Dec 14. 2022

자연이라는 도화지

2022년 11월 6일


똑똑똑. "식사하세요~"

조식


사장님의 노크 소리에 피곤한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은 벌써 만석. 새로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사장님의 정성이 담긴 한식을 먹는다. 둘러앉은 사람들은 이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벙커는 어땠어요? 팔로알토가 오늘까지 열린다고 해서 갈지 말지 고민이에요.' 이런 식. 여행객들은 나이, 고향, 이름 그 어떤 관계성을 찾지 않은 채 '스페인 여행'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한다. 굳이 애써서 나를 포장할 필요가 없는 이런 종류의 대화는 쉽고, 편안하다.


호프만 베이커리


일요일 아침부터 부리나케 달려간 호프만 베이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3일 전에 보지 못한 다양한 맛의 크루아상이 진열되어 있었다. 돈이 많았다면 하나씩 다 먹어봤겠지만, 막바지 여행객에는 그럴 돈이 없다. Y와 나눠먹을 클래식 크루아상 하나와 사장님께 선물드릴 조그만 과일 타르트 케이크를 사서 문 밖을 나선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갑작스럽게 비행기 체크인을 하느라 벤치에 털썩 앉았다. 원하는 자리를 얻은 후 문득 고개를 드니 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라피티와 카탈루냐 국기를 연상하게 하는 벽돌들은 바르셀로나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낸다. 매번 바쁜 걸음을 좇으면서 다니느라 거리의 풍경을 제대로 감상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 아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이 바르셀로나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기에.


카탈루냐 광장 중심


바르셀로네타 해변에 가 있는 Y를 만나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가던 도중 카탈루냐 비둘기 광장의 중심을 보았다. 소문대로 비둘기 떼로 덮여있었다. 외국 사람, 특히 유럽인들은 비둘기를 반려동물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모이를 주고, 친절을 베푸는 행동은 반복되어 비둘기의 콧대를 높여준다. 하지만 나에게 비둘기란 날갯짓 하나에 수많은 기생충을 떨어뜨리는 위생적이지 못한 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극한의 애정을 보이는 그들을 이해하기 다소 힘들다.


요트



카탈루냐 광장에서 네타 해변까지 가는 교통은 버스 하나뿐이다. 20분 정도 시내버스를 타고 Y가 있는 위치 근처에 내렸다. 화려하고 값비싼 하얀색의 요트들이 즐비하게 서있는 풍경을 바라보며 부의 전유물을 가진 그 누군가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 주인 솔직히 내가 되고 싶다.


바르셀로네타 해변


오후 12시.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은 해변을 선명하게 담아낸다. 푸른 지중해 바다에 비친 윤슬마저 눈이 부셔서 맨눈으로 볼 수가 없다. 모히또와 돗자리를 파는 상인들, 서핑을 즐기는 청춘들, 모래에 드러누워 태닝을 하는 노인들. 자연, 그 날것의 풍경과 모든 사람들의 행동은 자연스럽다. 브래지어를 벗은 채 당당히 해변을 걷는 중년의 여성까지도.




대충 겉옷을 깔고 벌러덩 누웠다. 누워서 본 바르셀로나의 해변은 투명한 파란색. 마침 제트기 2대가 구름 줄을 그으며 상공을 가른다. 모든 것이 평화로운 현재의 상황이 더없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껏 혈안이 되어 살아왔는가. 자연 하나 제대로 감상할 여유와 시간이 없는 삶은 옳은가.' 무수한 상념에 사로잡혀 이대로 떠나기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발을 벗고, 바지 소매를 거둬 바다에 발을 담갔다. 발가락에 닿은 물의 감촉이 현실의 감각을 깨워준다.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 바다의 밀당에 이내 뒷걸음질 친다. 장난을 치느라 모래 범벅이 된 발을 턴다. 건조한 지중해 모래는 발에서 쉽게 떨어졌다. 이곳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할 시간이 왔다.


푸아그라 스테이크


점심을 먹으러 해변 근처에 있는 'Cerveseria Vaso de Oro'라는 가게를 갔다. 사람이 정말 많아서 안에 진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름에서 드러나듯 이곳은 맥주가 맛있기로 유명하다. 시원한 맥주와 인기 메뉴 푸아그라 타파스를 시켰다. 처음 맛 본 푸아그라(거위 간 요리)는 Y의 말대로 느끼한 맛이었다. 기름과 소금에 절인 대창을 먹는 느낌. 그래도 맥주가 푸아그라의 느끼 한 맛을 잘 잡아주어 나름 맛있게 잘 먹었다!



벙커는 바르셀로나에서 꼭 가겠다고 다짐했던 장소였다. 아쉽게도 Y는 벙커 대신 시내를 구경하겠다는 의사를 비추었다. 여자 혼자 벙커에 가기에는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너무도 많이 들어 잠시 포기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후회하기 싫었다. 오늘이 바르셀로나의 야경을 누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기에 더더욱이.


개선문

 

혼자가 된 나는 벙커를 가기 전 조금은 떠버린 시간을 채우기 위해 개선문으로 향했다. 프랑스에서 보았던 하얀색의 개선문과는 다른 빨간 벽돌의 개선문과 커다란 야자수는 정말이지 스페인스러웠다.


벙커로 가는 길은 여러 경로가 있지만, 나는 8회 교통권을 끊어 메트로를 타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나 메트로에서 내린 후 벙커까지 걸어 올라가는 길이 너무 멀었다. (메트로보다 버스 타는 것을 추천한다.)


벙커로 가는 길


그라피티가 그려진 돌계단을 하나하나 밟다가 멈춰 서서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경관은 전망대의 기대치를 높여준다.


벙커


오후 5시. 드디어 벙커에 도착했다. 아직 일몰이 일어나기 직전인데도 사람들이 붐볐다. 한 가지 놀라웠던 사실은 한국인이 정말 많았다는 것이다. 바르셀로나에 여행 온 한국인은 여기 다 모여있는 것 같다는 느낌에 약간의 이질감이 들긴 했지만, 덕분에 치안에 대한 걱정을 한결 덜어낼 수 있었다.


비밀 문


빨간 Estrella damn 맥주 한 캔을 벗 삼아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뒤에 조용히 걸터앉았다. 한 청년이 그라피티가 무성한 비밀 문에 들어갔다. 스페인 내전 당시 병사들이 숨었던 곳인가?


이후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나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내가 앉은자리에 음향기기를 깔더니 디제잉을 하기 시작했다. BGM이 깔리고, 사람들은 힙한 무드에 들썩인다.



저 멀리 사그라다 파밀리아와 바르셀로네타 해변이 한눈에 보인다. 단연코 바르셀로나 최고의 일몰 스폿이다.


어김없이 3인칭 관찰자 시점이 되어 사람들을 구경하는 도중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이틀 전 맥줏집에서 함께 술을 마신 민박집 40대 여성분. 그리고 그 옆에 또 다른 인연이 서 있었다. 포르투, 리스본, 그라나다에서 마주쳤던 20대 여성분. 마주치자마자 우리는 소리를 질렀다. 만나자고 약속을 한 게 아니었다. 어떻게 4번이나 마주칠 수 있는 걸까. '대본도 이렇게 쓰면 욕먹어!'라는 표현이 지금 상황에 딱 어울렸다. 여러 인연들이 엉킨 것에 대한 신기함을 느끼며 자연스레 같이 있던 한국인 분들과 합석하게 되었다.



그렇게 급조된 동행 무리와 벙커의 앞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분들이 가져오신 소중한 간식거리를 먹으며 소소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모처럼 얻은 짧은 휴가를 누리러 온 30대 직장인, 퇴사 여행을 온 20대 여자분, 두 딸을 두고 혼자 스페인에 오신 40대 여자분. 그들이 공통적으로 부러워하는 휴학생인 나까지. 나이가 들어 직장에 자리를 잡고, 일이라는 것을 하게 되면 일주일 이상의 긴 여행을 하기 힘들어진다고 그들은 일관되게 말했다. 그러니 지금 여행 온 것은 아주 잘한 선택이라고, 부럽다고.


이후 내가 어떤 일을 하며 밥 벌어먹고 살지는 모르지만, 그때가 돼서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적어도 후회는 없겠지.



벙커의 하늘은 시시각각 오묘한 색들로 물든다. 때로는 하늘색이, 초록색이, 주황색이, 분홍색이... 하늘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든 색들이 나를 감싸는 듯한 느낌은 감동 그 자체이다.



서쪽으로 해가 저물고, 동쪽에서 하얀 달이 떠오른다. 지구의 자전이 몸소 느껴진다. 청춘의 그림자는 자연을 벗삼아 한 폭의 수채화같이 펼쳐졌다. 무궁무진한 색깔들로 채워지는 벙커의 하늘처럼 나도 나만의 도화지를 장식해나가자. 그것이 수채화인지, 유화인지, 아니면 아크릴화인지 알 수는 없으나.



7시가 조금 지나자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희미한 야경이 들어왔다. 육안으로는 잘 확인할 수 없어 휴대폰으로 확대해야만 보이긴 했지만!


17일간의 여행을 하며 겪은 수많은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일어났던 벙커를 끝으로 공식적인 일정은 모두 종료되었다.



이후 그들과 헤어지고, 체력이 다 소진된 채 숙소에 돌아왔다. 원래는 마지막 밤을 장식하기 위해 Y와 바르셀로나 클럽에 가려고 했으나 지칠 대로 지친 몸이 말을 안 들었다. 아쉽지만 클럽 약속을 취소하고, 급한 대로 저녁을 해결했다. 일요일인 탓에 많은 가게들이 문을 열지 않아 근처 한인마트에 들러 컵라면과 Damm Lemon 맥주를 샀다. 바르셀로나의 마지막 저녁치곤 조촐했지만, 시원한 맥주 한 잔과 얼큰한 신라면은 긴 하루를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이전 16화 바르샤 바르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