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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라는 것, 살아보기 위한 방법이라는 것.

소설 내게 무해한 사람

"어른이 되고 나서도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때 마다 나는 그런 노력이

어떤 덕성도 아니며 그저 덜 상처받고 싶어

택한 비겁함은 아닐지 의심했다.


어린 시절,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 습관이자 관성이 되어

계속 작동하는 것은 아닐까.

속이 깊다거나 어른스럽다는 말은

적당하지 않았다.


이해라는 것, 그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택한 방법이었으니까."


-내게 무해한 사람, 저자 최은영-

소설.JPG


내게 무해한 사람의 문장을 보며

'이해'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저는 10대 때 생존으로서의 이해를 택했던것 같습니다.

10대 때 또래 애들은 게임을 좋아하고 이와 관련된 얘기를 주로 했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게임을 하고 얘기를 나누기도 했었습니다.


좋아하진 않았으나, 그러지 않으면 관계가

느슨해지고 끊어지지 않을까 싶어서

택한 저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20대 중후반을 넘어서

저의 이해는 생존보다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방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오면서

우리는 너무 달랐고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저를 내려놓고

그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내게 무해한 사람의 문장을 보면서

결국 다 관계가 느슨해지지 않고 팽팽해지기 위한 노력이자

생존 방식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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