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의료 체계의 한계를 마주하다.
"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하냐고요. 호흡이 불안정하다고요." 남편이 울부짖는 걸 들었다. 나는 거의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더 이상 아프다는 감각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기력이 없었다. 그렇게 처음 복지국가의 무료 의료시스템에 한계와 이면을 마주했다.
유럽은 위드 코로나를 빠르게 실행했고, 덴마크는 애초 마스크 의무화를 없앤 지 오래되었다. 심지어 공항에서도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어서 더 이상 코로나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의문을 가지게 할 정도다. 지난 월요일 라트비아에 다녀온 남편을 마중 나가기 위해 코펜하겐 공항에 갔는데, 갑자기 목이 간질간질거리더니 마른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건조해서 그런 건가 싶어 물을 마셔보아도 기침이 멈추질 않았고 밤에는 으슬으슬 춥기까지 했다. 새벽 3시쯤 되었을까? 목이 너무 아파 잠에서 깼는데, 목소리가 아예 나오지 않을 정도로 목이 부어있었고 약간의 두통이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집에 있는 감기약을 일단 먹었다. 그렇게 다시 잠을 청했는데 눈을 떠보니 상태가 더 악화되어 있었다. 남편은 출근을 했고 홀로 마트에 셀프 키트를 사러 갔지만 팔지 않았다. 두 곳이나 가보았는데 마스크만 있을 뿐 결국 검사를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기력이 없어서 약국까지 갈 수가 없을 것 같아 남편에게 퇴근길에 테스트기를 사다 달라고 한 채 잠이 들었다.
한참 자고 눈을 떴는데 온몸이 경직된 상태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식은땀으로 옷은 모두 젖어있었고 어지럽고 두통이 너무 심해 눈을 뜰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휴대폰을 겨우 겨우 찾아 남편에게 전화를 했고 놀란 남편이 바로 퇴근을 하고 집으로 달려왔다. 자연치유가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는 유럽에서 감기 몸살이나 독감은 그냥 집에서 쉬는 게 답인지라 웬만하면 남편도 옆에서 간호만 했을 텐데, 열이 너무 높고 몸에 열꽃이 핀 걸 보고 놀라서 응급센터에 전화를 했다고 한다. 덴마크에는 두 가지 응급 연락처가 있는데 하나는 앰뷸런스를 부를 수 있는 번호, 즉 정말 사람이 죽어가는 위급 상황에 쓰이는 번호와 응급실에 가기 전 미리 예약하는 번호가 있다. 응급실에 가는데 예약을 하고 가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그래야 그나마 대기 시간이 줄어들기에 미리 전화를 해서 상담을 받고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응급상황 번호도 전화를 하고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꽤나 길다는 것. 남편은 애가 타고 당장 나를 업고 응급실로 달려가고 싶지만 가서도 무한 기다려야 할까 걱정되어 상담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한 30분쯤이 지났을까, 남편이 나를 업고 택시를 탔다. 근처 응급실에 도착했는데 상태가 더욱 악화되어서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고 입술을 말라가고 세상이 노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잠시 의식을 잃었던 것 같은데, 눈떠보니 병실에 누워있었다. 시간은 한 시간 이상이 흘러있었던 것 같다.
의식이 돌아오다 보니 온몸에 통증이 더 잘 느껴졌는데 팔과 다리 근육이 모두 마비되고 근육이 눌리는 느낌에 폐 단전에서 올라오는 기침과 그로 인한 두통 그리고 속이 메슥거리기까지 했다. 열이 40도까지 올랐다가 내렸다를 반복하면서 식은땀으로 옷이 흠뻑 젖어 몇 번을 갈아입었다. 거의 5시간에 걸쳐 코로나 검사, 독감, 소변검사 등을 하고 종이컵 2개 분량의 피를 뽑았다. 약을 먹고 훨씬 안정적이게 되었을 때는 휠체어를 타고 엑스레이 검사와 심전도 검사까지 하게 되었다. 코로나 검사도 음성, 독감 검사도 음성. 염증 수치가 높게 나왔다고 하는데 어떤 바이러스인지 모르겠지만 급성 염증이 원인인 것 같다고 했다. 의사는 "아마도 코로나 변이 일수도 있는데 잘 모르겠네요."라고 말했고, 간호사는 "이제 열이 내렸으니 생명에 지장은 없는 것 같아 집에 가셔도 될 것 같아요"라고 했다. 끝으로 의사는 만약 내일도 아프면 지정 의사인 GP(General Practitor)에게 연락하라고 했다.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아 남편이 GP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이야기했는데, 스케줄이 꽉 찼으니 다음 주에 방문하라고 했다. 남편은 내게 이래도 덴마크가 천국이냐고 물었다. 차라리 제 값을 치르고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받는 게 낫지 않겠냐며. 기다리다 죽는다는 게 이럴 때 쓰이는 말이라고.
응급실 비용과 모든 검사 및 약값은 모두 무료였다. 덴마크는 치과 및 정신과 이외에는 모든 의료비용이 전부 무료인데 심지어 암에 걸려서 치료를 받는다고 해도 무료다. 이 말만 들으면 천국에 와있는 것 같다. 내가 암에 걸려도 정부가 나를 책임져준다니. 아이러니하게도 덴마크에서 암 발생률 및 목숨을 잃는 확률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다. 지난주만 해도 주변에 남편 지인 두 분과 내 지인 한 분의 암 소식을 전달받았고 세 분 모두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말기 상태라고 전해 들었다. 치료가 무료이긴 한데, 사전에 한국처럼 미리 건강검진을 받지 않을뿐더러 검사를 받기까지 최소 일주일에서 몇 달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덴마크에 개인병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민간 병원이 존재한다. 따로 민간 보험을 들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개인 의사를 찾아가서 더 나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지만 이마저도 정해진 시간에 갈 수 있을 뿐. (주로 4-5시면 클리닉 문이 닫는다) 결국 응급 서비스는 국가가 정해둔 병원에 가야 하는데, 이마저 대기 후 상담을 받고 OK사인을 줘야 응급실에 갈 수 있으며, 가서도 대기를 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앓고 또 앓았다. 다른 방도가 없으니, 살아야 한다는 집념으로 홀로 홍삼액도 먹어보고 자몽즙도 마시고 억지로 꾸역꾸역 마시고 먹어보았다. 기침이 너무 심해서 잠을 거의 잘 수 없었고 정신을 제대로 차리고 나니 벌써 목요일이 되어있었다. 이제 좀 살겠구나 싶었고, 내게 또 이런 위급 상황이 생긴다면 그리고 내가 운이 좋지 않아 기다리다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의료 민영화와 공영화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는 상황도 무섭지만, 덴마크는 무상 의료라 정부 자체에서 의료 수요를 제한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기다리다 치료를 못 받는 상황도 참 무서운 일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회민주주의 국가를 옹호하고 지지한다. 그중 대표국이 덴마크인데 높은 세율만큼이나 투명하게 되돌아오는 복지 때문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중 한 곳, 안전하고 깨끗하고 무상 교육과 무료 의료복지는 모두 높은 세율에서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가 계층이 아닌 노동자 계층으로서 내게는 이곳이 천국 같아 보였고, 그래서 이곳에서 뼈를 묻고 싶었다. 이곳이 바로 지상낙원이 아닐까 싶었다. 평범한 나 같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은 이곳이 아닐까 싶었다. 의료 체계에 있어서 위급 상황에 놓여보니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된 것 같다. 죽음을 앞에 마주한다면 과연 이곳이 천국이 맞을까?
복지국가에서의 무상의료 체계에 대한 한계와 단점을 제대로 느끼며 한국의 건강보험과 의료 시스템에 새삼 감사함을 느끼게 되었다.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지만 정신이 제대로 돌아와 이렇게 글도 쓰고 다시 한번 덴마크와 복지국가 그리고 무상의료 체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