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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Choi 메덴코 Oct 29. 2022

이직 후 겪는 성장통

만 서른이 된 후 흘린 첫 눈물

덴마크 회사로 이직한 지 어느덧 3주가 지났다.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운 것들의 연속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새로운 직책, 업무, 환경 그리고 동료들까지 그 어느 것 하나도 익숙한 게 없었다. 몇 번의 취업과 이직을 겪어봤고 경력이 쌓여도 '이직'은 정말 매번 할 때마다 설레고, 두렵다. 더군다나 나라를 바꿔 이직한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이직을 한 후로 주말이 되면 그냥 하루 종일 집에서 자고 싶을 정도로 에너지가 방전된 상태다. 지난 3주 동안 잘하고 있는 중이지만 꽤나 새로운 환경이 버거웠나 보다.


업무를 마치고 회사에서 핼러윈 파티까지 참가한 후, 집에 오는데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마침 남편이 지하철역까지 마중 나와있었는데 남편을 보자마자 입을 삐쭉삐쭉 거리다 눈물이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다. 놀란 남편이 무슨 일이 있었냐고, 괜찮냐고 안아주었다.


그리고선 남편이 내게 하나의 질문과 하나의 인사이트를 주었다.


"요즘 바빠서 아침마다 명상 안 한지 꽤 된 것 같아"

"요즘 당신을 힘들게 하는 게 일이야, 사람이야?"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나는 더 크게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집이 어딘지 모르겠어. 나도 집에 가고 싶은데 이제 한국은 내 집이 아니야. 근데 나는 덴마크 사람도 아니잖아. 근데 오늘은 나도 집에 가고 싶어."


사실 매일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하루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곤 했는데 진짜 무의식 속에 있던 걱정과 스트레스는 단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원하던 것을 얻었고 당연히 이직 후 새로운 환경에서 겪어야 할 시간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래서 어젯밤은 그냥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냥 무거워진 몸과 마음을 이끌고 남편과 집으로 돌아와 품에 안겨 기절하듯 쓰러져 잤다.


그렇게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남편 말대로 바쁘다는 핑계로 아침에 10분씩 하던 명상을 안 하고 있었고, 내 마음이 요즘 어떤지 제대로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해소하지 못한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회사에서 너무 외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이곳저곳에서 많은 경험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아시아에서 보냈던 내게 유럽은 여전히 낯설고, 차갑고 어렵다는 것이다.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다. 글을 쓰면서도 눈물이 차오를 만큼 아직 내겐 좀 버거울 때가 많다. 다수가 아닌 소수로 살아가는 마음이라고 할까.


먼저 본사 자체에 아시아인이 별로 없다. 정말 전 세계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라 매일 만나는 다른 국적의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그중 아시아인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100명 정도 되는 본사 마케팅 부서에는 내가 유일한 한국인이다. 가끔 다른 동료들은 본인과 같은 국적의 동료들을 만나 본인의 언어로 소통하기도 하지만 나는 한국지사에 있는 분들과 연락하지 않는 이상 아예 한국어를 쓸 일조차 없다. 그게 뭐 대수인가 싶었는데, 종종 다른 동료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대신 몇 없는 중국인 동료들이 잘 챙겨주려 해서 고맙기도 하다.


어제 회사에서 퇴사자 파티가 2번이나 있었고, 바로 핼러윈 겸 한 달에 한번 열리는 사내 금요일 파티로 거의 근무를 하지 않은 날이었다. 그게 어제 나를 울게 만든 원인이었다. 두 번의 연속의 퇴사자 파티를 하느라 처음으로 많은 동료들과 어울릴 기회가 있었다. 덴마크인, 그리스인, 미국인, 네덜란드인, 이탈리아인, 영국인, 헝가리인, 슬로바키아인, 체코인 동료들과 둘러앉아 잡담을 하는데 도무지 내가 알 수 없는 이야기들로 가득 찼다.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에서 오는 거리감이었다. 대부분이 유럽인 동료들이라 나라는 다르지만 어린 시절 추억이 대부분 비슷하다. 대부분이 북미 문화를 소비하고 자랐다.


반면 나는 한국에서 10대의 대부분을 보낸지라 한국 정서에 맞는 고유의 문화를 소비하며 자랐다. 내게 북미 영화, 음악 등은 20대가 되어서야 조금씩 익숙해졌기에 그들이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공감대가 형성이 되지도 않았고, 대화에 낄 수가 없었다. 타인의 말을 잘 경청을 해주는 것이 나의 장점이지만 너무 홀로 동떨어지는 것 같아 대화에 참여하려고 다른 점들을 설명해주는데 그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한국에 대한 관심도 없고, 대부분의 동료들은 아시아를 떠올릴 때 일본만을 동경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래서 그냥 내 이야기는 뒤로했다.


대신 그들의 대화 속에 내가 모르는 단어들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그들이 소비한 문화, 좋아했던 팝 스타 등 내게는 너무나 생소했다.  그렇게 두 번의 힘든 퇴사자 축하파티를 끝내고 핼러윈 파티에 참가했는데, 외로움은 조금 더 증폭되기 시작했다. 동료들은 자신과 같은 국적의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타 팀 동료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대화의 주제는 유럽 동료들의 어린 시절 과자, 음악, 학창 시절이었다. 흥미롭게 듣고 배우는 시간이었지만 전혀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 것에서 외로움을 느꼈던 것 같다.


아시아에서 근무를 할 땐, 국적이 다르더라도 비슷한 문화와 환경에 자라 대화가 훨씬 더 수월하고 공감대가 형성이 잘 됐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아시아 내, K 문화 소비가 자리 잡은 지 오래라 한국인이라는 것이 플러스가 될 때가 참 많았다. 그게 알게 모르게 힘이 되고 위안이 됐었다.


그냥 어젯밤은.. 나도 집에 가고 싶었다. 내게 한국은 더 이상 포근하지 않고, 집이라고 부르기에 불편해졌다. 한국인 친구를 찾아서 만들지도 않는다. 대부분 외국인 친구가 더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해외에 나와 살면서 나의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감을 해줄 수 사람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내게 묻는다. 대체 나의 집은 어딘가? 대체 나는 어디에 속하는 사람일까? 라며 나를 괴롭힐 때가 있는데, 그게 어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을 잘 알면서도, 내가 선택한 삶이고 후회하지 않고 또 늘 감사하지만 가끔 이렇게 무너질 때가 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일 텐데, 어제는 왜 그렇게 센티했을까 싶다.


그냥 어제는 그런 하루였나 보다.

그럴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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