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항상 덴마크라는 사회가 도대체 어떻게 굴러가는지 궁금했다. 기본으로 정부에서 지정한 5주의 휴가와 OECD 국가 중 근로시간이 가장 짧은 국가 중 한 곳. 심지어 내가 근무하고 있는 회사는 휴가가 6주이다. 그뿐만 아니라 'Mental Sick day off'라고 해서 스트레스가 과한 날 쉴 수 있는 휴가가 따로 있다. 회사마다 상이하겠지만 우리 회사와 남편 회사 두 곳에 모두 있다. 이런 엄청난 복지와 짧은 근무시간에, 한국의 절반 정도 크기에 자원도 풍부하지 않은 이 나라는 전 세계의 부국 중 한 곳이다.
그래서 너무 궁금했다. 회사에 근태라는 개념도 딱히 없고, 휴가는 30일을 주는 이 나라는 대체 도대체 누가 일을 하는 걸까? 그리고 어떻게 경제가 돌아갈까? 사업을 하는 사람의 입장이라면 너무 답답하지는 않을까? 등등 질문이 참 많았다. 한 달을 덴마크에서 회사를 다녀보니 궁금증들이 조금씩 해소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몇 가지 '아하'하게 되는 것들도 많고 이 유토피아 같은 세상의 단점도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전 노르웨이 동료와 출근길에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녔는데, 미국 근무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아 덴마크로 대학원을 오게 되었고 그 후로 쭉 덴마크에 살면서 커리어를 쌓았다고 했다. 왜 미국 근무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너무 경쟁이 치열하고 숨이 막혔다고 했다. 그러면서 본인은 절대로 다시 북유럽 밖에서 일할 생각이 없다며, 내겐 일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이 많다고 했다. 커리어가 본인 인생에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그녀의 전 남자 친구는 한국인이었는데, 자기가 만나본 남자 중 가장 일에 미친 사람이었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근데 안쓰럽다고 생각이 들었던 건 그가 해야 할 업무가 분명 한 사람이 할 일이 아니었다는 거다. 족히 2-3명이 해야 할 업무를 혼자 하고 있어서 그렇게 바빴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한 말.
"세명이 할 일은 세명이 해야죠. 그렇게 혼자 많이 일하는 건 지속 가능성이 없다고 봐요"
모든 한국 회사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한국에서는 두 세명이 할 일을 혼자 다해야 해"라는 말을 자주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나를 포함해 주변 사람들이 번아웃이 자주 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지속가능성이 없다는 말에 공감이 갔다.
그러다 연결지은 것이 바로 '전문성'이다.
한국 IT 스타트업에서 첫 커리어를 시작한 나는 퍼포먼스 마케터로 입사를 했었다. 그때는 뭐가 뭔지도 모르고 입사를 했는데, 참 여러 가지를 배웠다. 하얀 도화지처럼 백지상태라 그냥 무작정 닥치는 대로 배우고 습득했던 시간들이었다. 페이스북, 구글 등 광고를 어떻게 집행하는지 툴을 배워야 했고 데이터 분석하는 법도 배워야 했으며 콘텐츠 기획부터 제작까지 전반적인 디지털 마케팅 플로우를 익히는 시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글을 쓰는 걸 좋아해서 카피라이팅도 했었고 갑자기 기회가 생겨 해외지사에서 팀을 이끄는 일도 했었다. 즉 나는 제너럴리스트로 성장했다.
그런데 덴마크에 왔을 때 놀라운 점을 하나 발견했다. 많은 공고에 '스페셜리스트'가 있었고, 전문성을 굉장히 중요시한다는 것을 목격했다.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이라서가 아니라, 많은 스타트업들도 모두 전문인력을 원하는 시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즉 이것저것 잘하는 사람보다 '하나' 제대로 잘하는 사람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하는 곳에 지원을 할 때, 가장 강점인 것을 연결시켜 면접을 보곤 했다. 무엇보다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왜 이렇게 했던 업무가 많나요? 왜 이렇게 여러 가지를 했나요?"였다. 그게 장점이라고 생각했는데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재 회사도 보면 정말 세분화가 잘되어 있는데, 가끔 드는 생각은 "저걸 네 명이서 같이 한다고? 나는 혼자 했던 건데?"이다. 물론 현재 근무 중인 회사는 규모가 큰 글로벌 회사라서 유난히 심한 것 같기도 하다. 아무쪼록 마켓이 전반적으로 업무를 굉장히 세분화해서 하나에 집중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 같다. 단점은 너무 세분화되어서 정말 하나의 고인물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고, 장점은 무엇보다 한 사람에게 업무에 휩쓸리지 않게 하려고 노력을 한다. 요즘 거의 매일 듣는 질문이 "업무가 너무 벅차면 말해요."이다.
솔직히 한국인으로서 이 정도의 업무량은 벅차지도 않고 더 줘도 잘 해낼 수 있는 정도인데, 그만큼 한 사람에게 업무가 쏠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 나의 빈자리를 커버해줄 수 있는 담당자가 늘 있다는 점이다.
입사하고 첫날, 내가 받은 질문은 "휴가 계획이 언제예요?"였다. 그만큼 휴가를 중요시한다. 참고로 6주 휴가를 한 번에 몰아서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누가 언제 자리 휴가를 가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고,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담당자가 필요하다. 그 누구도 눈치 보지 않고 언제든 휴가를 쓸 수 있다. 예를 들면 여름에는 오피스가 텅텅 빈다고 한다. 또 다가올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라고. 아직 겪어보지 못했지만 그 와중에 나처럼 문화권이 다른 사람들이 일을 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인도인이라면 크리스마스보다는 인도의 축제인 디왈리가 더 중요한 행사이니 그때 쉬고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일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이게 다국적, 다문화 직원들을 보유한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휴가제도가 늘 반갑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요즘. 아무리 대체자가 있어도 본인이 맡은 업무를 100% 이해하고 커버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협업을 하는데 가장 힘든 부분이 있다면 연차를 사용하는 날이 너무 많거나 길어서 연락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가장 답답한 부분이기도 하다. 곱씹어보면 사람들이 좀 책임감이 없다고 느껴지기도 할 정도다.
모든 북유럽, 덴마크인들이 칼퇴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워커홀릭도 분명 존재할 것이고 야근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현재 내가 근무 중인 회사만 봤을 때, 놀라운 점은 북유럽 동료들은 정말 빨리 퇴근을 한다. 오후 3시가 되면 사무실이 텅텅 비기 시작한다. 4-5시 이후로 남아있는 사람들은 주로 동유럽, 남유럽 그리고 북미권 사람들이다. 특히 북미권 사람들은 한국을 연상시킬 만큼 열심히 오래, 많이 일한다. 시니어들만 봐도 북유럽 시니어들은 정말 빨리 퇴근을 한다. 대부분이 가족 그리고 아이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라고 했다.
반면 남미나 북미 시니어들을 보면 여기가 덴마크인지 한국인지 헷갈릴 정도로 일을 한다. 그래서 느낀 건 이 나라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먹여 살리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열정적이고 열정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일할 수 있는 이유가 두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로 한국처럼 나이에 연연하지 않고, 본인이 원하면 승진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책임감이 커지는데 이 부담이 싫다면 주니어로 남아도 된다. 내 옆에 앉아있는 동료가 바로 그런 케이스고, 남편의 회사에도 50대 사원이 있다. 그런 이유인지 현재 회사 리더급 레벨에 덴마크 혹은 북유럽계 사람보다 외국인이 더 많은 것 같다. 커리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위로 먼저 올라가는 건 아닐까 싶다.
(외국에서 알게 된 덴마크인들 중 몇 명은 커리어 발전을 위해 본국을 떠난 사람들도 있다.)
두 번째로는 그저 추측일 뿐인데, 어차피 급여가 올라도 내야 할 세금도 오르기 때문에 사기가 떨어지는 건 아닐까 싶다. 현재 나는 38%의 세금을 내고 있고, 남편은 45% 넘게 내고 있다. 급여에 따라 세금을 내는 비율이 달라지는데 이럴 바에 돈을 많이 벌 의욕이 없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내가 사업가라면 이런 환경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생각해본 적이 있다. 과연 CEO들의 입장은 어떨까? 답답하고 속 터지지는 않을까? 특히 스타트업이라면 더 그렇지 않을까? 하고 남편에 물어본 적도 있다. 남편은 6년 째 덴마크 스타트업에서 근무해오고 있다.
남편: "음, 덴마크는 확실히 빠른 성장보다는 지속가능성 있는 성장을 중요시하는 것 같아. 우리 회사 CEO만 봐도 본인 자체가 가족과의 시간을 가장 중요시하고, 당장의 성장과 이익만 보지 않거든.“
초기 스타트업에서 다니면서 빠른 성장보다 지속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니.. 그리고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다니. 내겐 참 드물고 신기한 말이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덴마크에는 강소기업, 그리고 장수하는 기업이 많다. 당장 1년을 내다보지 않고 50년, 100년 후를 생각하며 기업을 운영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덴마크는 창업하기 좋은 나라 중 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만큼 정부의 지원이 있고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는 복지제도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직 배울 것도 많고, 알아야 할 것들이 많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더 많이 보이고 더 많이 배울 수 있겠지. 내 시각과 분석이 맞았을 수도, 틀렸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쪼록 저놈의 연차 때문에 의사소통 부재로 조금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6주 휴가, 참 달콤하게 들리지만 나는 아직 6주 휴가를 몰아서 쓸 용기가 안 난다. (스스로가 힘들 것 같다. 그렇게 쉬고 돌아오면)
아무쪼록 지난 한 달 회사 다니느라 고생했다.
앞으로도 잘..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