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만 31살 생일
오늘은 나의 생일이다. 감기기운이 있어 어제 일찍 잠이 들었다. 그래서 새벽 일찍 6시쯤 눈이 떠졌는데, 침대 옆에 꽃과 편지가 놓여있었다. 설마 남편이 준 건가 싶어 조용히 들고 주방으로 나왔다. 그리고 편지를 펼쳤는데 무려 4장의 손 편지가 있었다. 글씨체가 너무 예뻐서 이거 혹시 내 친구 중 한 명이 남편한테 부탁한 건가 싶어 맨 뒷장부터 살펴보니 남편이 쓴 거였다. 세상 놀라 첫 줄을 읽는데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남들은 별거 아닌 서프라이즈일 수 있지만 내게는 조금 많이 특별하고 남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편이 남자친구였던 시절이었다. 그와 맞이했던 나의 첫 생일은 비참하고 서글펐다. 그 당시 남편과 나는 20대 초반이었다. 그때만 해도 내게 생일은 너무 특별하고 뜻깊은 날이라는 생각이 가득 찼었다. 그래서 무조건 서프라이즈가 있어야 했고 모두가 밤 12시가 되면 나의 생일을 축하해줘야 한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생일 축하 문화에 길들여져 있던 나는 당연히 남자친구도 밤 12시가 되면 나의 생일을 가장 먼저 축하해 주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가 12시가 되기도 전에 잠이 든 것이다. 처음엔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자는 척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정말 잠이 든 것이었다. 그게 어찌나 속상하고 서글프던지.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인도에 살고 있는 가장 친한 친구는 12시가 되자마자 내게 전화를 걸어 생일 축하한다고 했다. 나는 엉엉 울며 고맙다며 근데 내 남자친구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대성통곡을 했다. 그 와중에도 잠만 잘자던 남자친구. 어리고 철없던 시절, 그게 어찌나 서럽고 서글프던지..
밤새 잠을 못 잤다. 그러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 남자친구는 갑자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갑자기 카드 결제 내역이 도착했다. 'XX꽃집 24,000원'. 그렇다. 우리는 카드를 같이 사용 중이었는데 남자친구가 생일 꽃을 사러 간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 그게 또 서러웠다. 저렇게 센스 없는 인간이 다 있나 싶었다. 그리곤 돌아와서 무언가를 끄적거리곤 등교를 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글씨체를 보며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생각했다.
이렇게 센스도 없고 정성도 없다니.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생각했었다. 무엇보다 그의 마지막 말이 나를 화나게 했다.
취업하면 그땐 꼭 좋은 선물을 사줄게.
나는 그에게 물질적인 선물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우린 그 당시 경제적으로 몹시 가난한 커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는 언제나 마음이 담긴 진심 그리고 정성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란 걸 모른다는 사실에 최악의 생일이라 생각했었다. 이를 모르는 남자친구는 삐져있는 나를 보고 다음번 생일엔 좋은 선물을 계속 사주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2016년 10월 19일, 그날 하루 정말 펑펑 울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언제 비싼 선물 달래? 그냥 가장 먼저 내 생일 축하해 주면 안 돼? 어떻게 잘 수가 있어? 그리고 A4용지 쭉쭉 찢어서 편지 써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렇게 정성도 센스도 없어?
이렇게 말하며 더 이상 생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남자친구와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것이 그 사람이 최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는 그냥 정말 그렇게 투박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랑 표현방식과 생일 축하방식은 편지와 서프라이즈가 아닌 좋은 선물을 주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그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도 나를 더 알게 되기 시작했다.
9년이란 시간을 함께 하면서 그리고 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이상 매년 찾아오는 생일 그렇게 특별하지 않게 되었다. 일단 체력이 되지 않고, 예전만큼 나의 생일 축하해 줄 친구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생일이 크게 기대되지 않았고 12시는커녕 11시가 되기도 전에 잠이 든다. 무엇보다 남편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며 감성적인 사람이었던 내가 이성적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도 꽤 큰 것 같다.
생일 선물도 이제 서프라이즈로 받는 불필요한 물질보다는 내가 필요한 걸 받는 게 더 좋다. 그래서 남편과 나는 서로의 생일과 기념일을 위한 '선물 리스트'를 작성해 두었다. 심지어 친한 친구와는 생일에 서로 품앗이하듯 돈을 보내준다. 맛있는 거 사 먹던지 혹은 필요한 거 사라면서.
1. 필요한 것
2. 가지고 싶은 것
이렇게 나누어서 우리는 선물을 하고 있다. 그리고 20대 때보다 경제적으로 많이 안정되며 이제 정말 물질적인 선물이 익숙해진 우리. 그래서 이번 생일도 남편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만 31번째 생일 아침,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4장의 손편지와 꽃을 보고 엉엉 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얼마나 노력하고 정성을 들였고 고생하여 이 편지를 썼는지가 보였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자꾸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우리 남편은 무척 투박하다. 감정표현에 무척 서투른 사람이다. 글 쓰는 걸 너무 싫어한다. 회사에서 팀원이 고민상담을 해오면 남편은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거냐며 물어볼 정도로 한 줄 쓰는 것도 어려워한다. 근데 그런 사람이 진심을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담아 편지를 써 내려갔다는 것을 보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을까. 저렇게 예쁘게 한 글자 한 글자이 진심을 꾹꾹 담아가며, 본인이 얼마나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지 글을 써 내려간 것을 보고 오랜만에 생일 아침에 대성통곡을 했다.
사람마다 사랑을 주고, 사랑을 하는 방식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의 사랑의 언어와 나의 사랑의 언어가 달라 힘들 때도 많았지만 9년을 함께 하다 보니 이제 상대가 받고 싶은 사랑을 줄줄 아는 관계가 되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또다시 남편은 나를 성장시켰고, 나도 남편을 성장시켰다. 남편을 통해 이 세상에 다양한 사람, 사랑과 표현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배웠고 내가 기대하는 사랑 표현이 아니라고 해서 상대가 나를 안 사랑하지 않다는 것을 배웠다.
그렇게 4장의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로 남편에게 달려가 또 한 번 울었다. 남편은 나를 말없이 꼭 껴안아주었다.
잊지 못할 나의 만 31번째 생일. 다음 달이면 10년 차가 되는 함께한 나의 인생의 동반자. 그와 함께 할 나의, 우리의 생일이 너무나 감사하고 소중하다. 사랑은 위대하고, 사랑은 나를 그리고 우리를 성장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