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ny Choi 메덴코 Mar 07. 2020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의 파견이 끝났다.

8개월 하고도 반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떠나는 마당이니까 이야기하는데
 있지, 나 매일 밤 울었어.
그리고 자카르타에 온 걸 후회하기도 했었어.



28살, 반년을 한국에서 그리고 나머지 반년을 '인도네시아'라는 나에겐 생소한 미지의 국가에서 보냈다. 그뿐만이 아니라 2020년, 나의 마지막 20대를 그곳에서 맞이했다.


20대 후반 즉, 거의 서른이 되면 나는 다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성숙해지고 세상살이가 조금 쉬워질 줄 알았다. 근데 점점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책임감'이라는 아이만 더 내 어깨에 더해질 뿐, 아직 나는 덜 큰 어른이었다. 그런 내가 나보다 네다섯 살이나 더 어린아이, 아니 동료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 하지만 나는 또 그래도, Go를 외쳤고 어느덧 8개월 반을 인도네시아에서 보냈다.


6개월을 생각했는데, 8개월이 되었고 적어도 1년을 지내게 될 줄 알았는데 8개월뿐이라서 아쉬웠다.


생각보다 내가 해야 할 업무들이 빠르게 정리되고 있었고, 더 이상 내가 없어도 될 정도로 나의 멤버들은 성장했다. 그리고 그들이 내게 보여준 성장은, 나의 내적 성장까지 도와주었다. 나는 사실 이 친구들을 도와야 했고, 가르쳐야 했지만 돌아보면 내가 배웠고 내가 많은 도움을 받았다.



떠나기 전 날 나는 솔직하게 다 말해버렸다. 나도 사람인지라, 너무 힘들었다고.


누군가의 퇴사/해고/입사


가자마자 해야 했던 일들 중에, 많고 많은 인도네시아어로 되어있는 서류보다도 힘들었던 건 '사람'이었다. 오래도록 알고 지낸 멤버가 떠나는 일, 떠내 보네야 하는 일 그리고 생전 본전 없는 누군가를 한 두 번의 인터뷰로 판단하고 고용해야 하는 것.


나의 파견의 목적은 단순히 '디지털 마케터'로서 인도네시아 시장 확장을 돕는 일손 목적으로 오게 되었는데 막상 오고 나니 내가 해야 할 일은 마케팅이 아니었다. 정식적인 명칭을 받진 않았어도 난 결국 그곳에서 Country Manager로서 업무를 맡게 되었다. 마케팅보다도 인사, 재무에 더 몰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처음에 그게 너무나도 막막하고 두려웠다. 아직 마케터 주니어인 내가 이렇게 마케팅에서 멀어진다는 것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그리고 내 어깨 지어진 큰 짐들.


'책임감'


정말 두 번째 말하는 것 같지만 나는 정말로 모두가서른 즈음이 되면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나는 여전히 '나'였다. 겉으로 티 내진 않아도 어찌나 떨고 불안하고 무서웠는지 내 어깨 위에 있는 책임감들을 보며 시니어들이 생각났고 팀을 리딩 하는 팀장들의 고충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도망갈 순 없으니, 그냥 정면돌파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 제일 힘들었던 건 내 손으로 내가 직접 인터뷰를 보고 고용한 사람이 영 아닐 때였다. 분명 좋은 사람이라고, 내 촉은 좋다고 실력자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입사 후에 너무나도 실망감을 안겨주어 떠나보내어야 했던 사람들.


그리고 오래 함께 했던 친구 중, 더 이상의 핏이 맞지 않아 나가야만 했던 친구들. 그런 날들이 계속될 때는 정말 끊임없이 울고 또 울었다. 무엇보다 힘이 들었던 건, 과연 내가 이런 업무를 해도 될 정도로 판단력이 있는 사람인지 그만큼 나도 괜찮은 사람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 때였다. 그래서 책을 더 읽기 시작했고, 공부를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지난 9개월 동안 내가 얻은 것은, 사람에 대한 '통찰력'이 조금 더 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사람은 겪어봐야 알 수 있지만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특성이 파악이 가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이 이 팀에 맞을지를 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인사 쪽을 담당하며, 즉 회사 내에선 EX팀에 속하는 업무인데 채용뿐만 아니라 복지 및 교육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고 파고들게 되어 지금은 약간의 지식과 경험이 쌓여 참 고마운 시간이라고 생각이 든다.



작년 8월 반둥 Bandung으로 간 워크숍



한 디자이너의 퇴사


1) 지금 이곳에서 일하는 게 행복한가

2) 지금 현재 하고 일이 즐거운가

3) 이 회사로부터 너는 무엇을 얻나

4) 당신은 회사에게 어떻게, 무엇을 기여할 수 있나

5) 앞으로 본인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6) 본인은 회사에게 바라는 점이 무엇인가

7) 어떤 점이 이 회사의 장점이고 단점인가



등등 대략 10가지 질문 리스트가 있었다. 너무나도 뻔한 질문이지만 나는 모든 멤버들에게 2주마다 이 질문을 던졌다. 실력이 출중한 친구더라도, 흥미가 떨어져 가거나 열정이 식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태도의 문제들도 발견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중 실력이 출중하던 성품도 좋았던 한 디자이너 친구가 이 질문들을 받은 지 5일 만에 내게 퇴사를 하겠다고 선언했고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내가 한 질문이 어려워서? 아니면 기분이 나빠서? 아니면 무엇일까. 내가 너무 무서웠나? 나랑 면담한 것이 싫었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근데 그가 내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나는 사실 너에게 너무 고마워. 나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사실 내가 하고 싶었던 건 따로 있었어. 근데 용기가 안 났고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흥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어.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기여할 수 없을 것 같아. 난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래"


그리고 그 친구는 그 달을 마지막으로 회사를 떠났고, 여전히 우리는 친구로 남았고 따로 만나기까지 했다. 


그 친구는 콘텐츠 디자이너였는데 원래 본인의 커리어를 UX/UI 쪽으로 쌓고 싶은 마음이 컸고 그 길로 가기까지의 용기와 시간이 필요했는데 내가 던진 질문으로 인해 마음을 다잡았다는 말에 나는 나쁘지 않은 성과라고 믿었고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내게 고마워하지 말란 말이야



나를 고용해줘서, 해고하지 않아서 고마워


종종 입사 후 또는 1:1 면담 후 멤버들은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화가 났다. 물론 문화적 차이도 있을 수도 있고 사고가 다를 수 있지만 많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이런 마인드와 말을 종종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보완해야 하는 부분이 많기도 하지만, 이들은 어쨌든 본인의 능력을 인정받아 이곳에 입사했다. 해고되지 않는 이유도, 조금 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곳에서 기여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내가 그들의 선배이자 팀장이라는 이유로 저런 말을 한다는 게 나는 개인적으로 싫었다.


"물론 운과 시기가 좋았을 수도 있어. 근데 어떻게 이게 나한테 고마워할 일이야? 기회를 줄 수 있는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지금 이곳에 있는 거야. 그걸 기억해"


지금 우리 멤버들 아무도 저런 말을 하지 않는다. 다들 본인의 가치를 알고, 그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본인의 몸값을, 가치를 높여가고 있다는 점. 그게 참 감사하다. 물론 내가 누군가의 입장에선 틀린 생각을 주입했을 수도 있지만 나는 늘 나 스스로에게도 말하고 생각했다. '나'를 위해 일할 것, 그게 결국 회사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얼마 전 이사 온 새로운 오피스



인도네시아가 아니었더라면



인도네시아에서 배운 것들 중에, 기억이 앞으로도 많이 남을 것 같은 것들이 몇 가지가 있다.


1. 인도네시아 세금제도 및 종류

2. 인도네시아 사업자 종류 및 명칭 등

3. 인도네시아 노동법 관련 등

4. 전반적인 재무회계 흐름(?)

5. 계약서 작성 및 계약 체결


나는 한국에서 현재 매달 내고 있는 세금이 몇 가지인지, 종류도 모를뿐더러 크게 신경 써본 적도 없지만 인도네시아에 와서 가장 먼저 배워야 했고 손 봐야 했던 것은 바로 '세금'이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세금 종류부터 이름까지 언제 납부해야 하는지, 몇 퍼센트 인지도 알게 되었다. 매달 세금을 직접 내가 납부했기에 더더욱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리고 사업자 종류 및 명칭들을 하도 공부하고 Agency와 함께 미팅을 하다 보니 진저리가 나도록 배우게 되었다. 물론 내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나름 시간이 흐를수록 결정에 있어서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


처음엔 한국에 있는 해외 재무팀과 협업하는 게 너무나도 힘들어서 운 적도 있다. 괜한 자존심을 부려 상사에게 혼나도 봤다. 왜 저렇게 깐깐하게 까다롭게 내게 많은 것을 요구하나 화가 난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로부터 배우고 함께 일할수록 그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상 무섭고 늘 떨렸던 업무는 바로, 타 업체와의 계약이었다. 그냥 일반적인 계약이라기보다 정말 중요한 인도네시아 사무실에 대한 존재 여부가 달려있는 그런 계약들을 해야 해서 많은 업체들을 만나고 미팅을 했었다. 그러면서 스스로 어떤 업체가 더 신뢰가 가는지 파악해야 했고, 내 선택이 옳지 않을까 봐 늘 발을 동동거렸다. 무엇보다 신규 오피스로 이사하는 과정도 내 인생에 가장 큰 금액이 오고 가는 거래건이었는데 모두에게 말은 안 했으나 난 정말이지 무서워서 이사할 때까지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다행히 좋은 곳에, 좋은 금액으로 협상까지 하여 무사히 입주했다.


그냥 기분이 좋은 날은 종종 이렇게 사진을 찍는다


동료 그 이상의 관계


차곡차곡 쌓아온 진심이 통해 단단해졌고, 신뢰가 쌓였다. 그리고  어느덧 멤버들이 공사 구분을 할 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너무 친구 같은 관계에 걱정했고, 그들은 나를 무서워했다. 그리고 한 친구는 내가 사이코패스라고 생각이 들만큼 회사 안과 밖이 달라 혼란스러워했다. 친구로서 다정했고, 동료이자 상사로선 굉장히 엄격했던 나를 이해하고 그들도 그걸 함께 배우기 시작했다.


나도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매일매일 인도네시아어를 공부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어울리고 알아가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내가 틀린 점 또는 보완해야 할 점을 그들에게 묻고 고치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신뢰를 쌓았고, 개개인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던 것 같다. 동시에 업무적인 성과도 이후로 오르기 시작했다. 우린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함께 성장했다. 아직도 변해야 할 점, 보완하고 나아가야 할 점이 너무나도 많다. 앞으로의 성장과 변화가 더 기대되는 친구들이다. 제대로 가이드만 해주면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친구들이다. 나는 이들과 일하면서 한국에선 절대 느낄 수 없는 그런 감정들과 신뢰 무엇보다 따뜻함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묵묵히 이들을 응원해주는 일만 남았다는 것을 알았고, 나는 모든 업무를 현지 리더 친구에게 인수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어쩌면 꿈만 같다.

지난 시간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의 생활.

참으로 많이 울고 아팠고 많은 것들을 배웠다.


내 인생에 정말 잊지 못할 시기이기도 하다.

브런치에 들려주고 싶은 에피소드가 참 많은데,

한 편에 다 담을 수가 없어, 이번 편은 이렇게나마 지난 시간을 기록해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