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애(2017~), 어글리후드
누아르, 액션, 스포츠, 정치 등,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장르에서 새로운 여성 재현과 젠더 구성을 보여주는 창작 방식은 이제 제법 자리매김한 듯 보인다. 액션 누아르 장르에서는 일찍이 <차이나타운>(한준희 연출, 2015)이 있었고, 최근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길복순>(변성현 연출, 2023)도 화제가 되고 있다. 로맨스 TV 시리즈 <스물다섯 스물하나>(2022)의 여주인공은 불같은 성정의 펜싱 선수로, 주조연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스포츠 성장물의 서사를 충실히 따른다. 정치 부문에서는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2021), <정직한 후보 1>(장유정 연출, 2020), <정직한 후보 2>(장유정 연출, 2022)가 각각 TV 시리즈와 영화로 여성 정치인을 중심에 둔 코미디를 선보였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런칭한 <퀸메이커>(2023)는 정통 정치 드라마 장르에서 정치인뿐만 아니라 재벌가, 정치인 주변의 인물까지 여성을 중심으로 두고 성역할 반전 구도를 이뤄내었다.
세계관과 캐릭터 디자인 모두 작가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웹툰은 이런 변화를 조금 더 적극적이고 다양하게 드러낼 수 있다. 국내 포털 사이트의 양대 산맥인 카카오(다음)와 네이버만 보아도 눈에 띄는 작품이 많다. 여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대기업 내 범죄조직에서 벌어지는 권력다툼을 그린 누아르 <더블랙라벨>(김태희, 2018~2019), 무협과 판타지가 섞인 동양 고전 세계관에서 인상 깊은 주조연 여성 캐릭터 서사를 선보인 <가담항설>(랑또, 2016~2020), 호러 장르에서 괴물과 대치하는 주체이자 해결의 열쇠가 되는 주연 인물을 모두 여고생으로 설정한 <먹이>(외눈박이/박수봉, 2019~), 액션 누아르에서 지위와 외향 모두 ‘남성적인’ 여성 캐릭터를 삽입한 <겟백>(세윤, 2019~), 외향만으로는 성별 구분이 어려운 여성 캐릭터들을 주조연으로 드러낸 <럭키언럭키>(가천가, 2019~2021) 등이 그 예다. 특히 <럭키언럭키>는 굳이 ‘남성적’이라는 설명이나 남성성을 모방하는 설정 없이 성별 구분 없는 몸과 다양한 외모를 그리는 방식을 통해 만화에서 재현하는 여성의 외형 범위를 확장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 글에서 들여다보려는 웹툰은 <어글리후드>(미애, 2017~)로, 작품에서 젠더 배치와 모방을 통해 성역할 반전을 드러내는 방식을 중심으로 분석하려 한다. 웹툰의 줄거리를 한 줄로 소개하면, 외계인이 유일신으로 군림하는 세상에서 교회 테러범으로 활동하는 여고생을 필두로 펼쳐지는 혁명 서사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현실의 계급과 다인종을 종교와 외계인을 통해 보여준다는 것이다. 유일신 행세를 하는 외계인 아래 교황이 세계를 다스리고, 신앙심이 곧 계급이며, 하위 계급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다. 주인공 엘사는 ‘D 계급’ 고등학생으로, 신앙심이 없어 암묵적으로 인간 이하 취급을 받고 작품 내에서 ‘흙수저’라고 표현된다. 어머니의 조기교육 덕에 일찍이 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릴 수 있었던 엘사는, 사제 집단에게 살해당한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실수로 ‘성수’를 마신 후 외계인과 동거하게 된다. 원래대로라면 성수를 마신 인간은 외계 기생생물을 받아들이는 그릇이 되어 이전까지의 자아를 잃지만, 엘사는 왜인지 자아를 잃지 않고 외계인의 자아인 에리얼과 동고동락하며 힘만 나눠 쓰는 존재가 되었다. 이후에도 엘사는 학교에서 왕따와 다름없는 ‘D 계급 아무개’다. 그러나 학교 밖에서 그는 교회 테러범 ‘어글리후드’로 활동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이야기는 ‘어글리후드’가 세계관 내 최하 계급인 ‘네임리스’로 이뤄진 저항 집단과 연대하여 교회 세력에 반란을 일으키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대로 멈출 순 없다>가 규율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어떤 것도 생산해내지 않는 ‘야만성’을 여자 고등학교에 대입했다면, <어글리후드>는 종교와 자본으로 감시와 처벌 체계를 강력하게 구축한 세계를 보여준다. 서로가 서로를 이단이 아닌지 감시하게끔 만드는 이 체제는 판옵티콘의 구조를 충실히 반영한다. 그리고 웹툰은 이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고 혁명을 완성할 주체로 여자 고등학생을 둔다.
작중 성별을 밝히지 않는 외계인 노동자를 빼면 주인공을 비롯한 상당수의 주요 캐릭터가 여성인데,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동료이자 스승으로 엘사를 훈련시키는 이웃집 체육 선생의 성별을 독자가 혼동하자, 작가가 직접 ‘체육 선생은 여자’라 언급했다. 그리고 당시 그 회차의 베스트 댓글 중 하나는 충격적이라는 소감이었다. 캐릭터가 우락부락한 몸이거나 짧은 머리인 것은 아니다. 다만 체육 선생, 큰 키, 얼굴과 몸 곳곳의 흉터, 군인 출신, 흡연자, 거친 말투와 늘 같은 체육복 차림, 가슴이 부각되지 않는 몸이란 특징이 모여 많은 독자에게 남성으로 인식된 것이다. 이 일화는 ’어떤 특징이 남성의 재현으로 여겨지는가‘를 보여준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웹툰은 곳곳에서 이러한 성역할 고정관념을 비튼다. 어릴 때부터 엘사에게 세계의 진실을 가르치고 네임리스 저항 집단을 만든 사람은 엘사의 어머니 레나 잭슨이다. 이를 통해 전통적으로 아버지와 아들로 이어지던 혁명 영웅 서사는 어머니에서 딸로 이어진다. 레나 잭슨은 엘사가 생사의 위기를 넘나들 때마다 그의 무의식에 등장해 조언하거나 정신 차리게 만드는 식의 소년만화 클리셰도 심심찮게 보여준다. 반면, 엘사의 아버지는 카페를 운영하며 성실히 살아가는 아름답고 다정한 소시민이다. 딸의 정체를 알고는 “전부터 말했었지? 넌 나보다 엄마를 훨씬 닮았다고. 하여간 둘 다 속 썩이는 덴 선수야..(51화)”라며 눈물짓는다. 폭동이 일어나면 피난처에서 외계인 친구들의 보호를 받으며 요리를 해준다. 이처럼, 엘사 가족의 성역할 반전은 엘사의 아버지를 통해 완성된다.
성역할 반전과 전복적인 젠더 배치는 모든 캐릭터에 세세히 들어가 있다. 대부분의 캐릭터는 교복이 아닌 이상 외형을 통해 성별 구분이 어려운데, 그만큼 다양한 몸이 재현되었거나 여성 캐릭터의 기본형이 ‘탈코르셋’이기 때문은 아니다. 웹툰 속 대부분의 인간 캐릭터는 대개 획일화된 미의 기준에 따라 가늘고 예쁘며, 판타지 만화답게 요란한 머리와 복장이 많다. 구분을 어렵게 만드는 요소는 오히려 여성 캐릭터의 몸매를 부각하거나 노출하지 않는 동시에 ‘섹시한’ 복장과 도구적 역할을 주로 남성 캐릭터에게 줌으로써 완성된다. 작중 사제이자 또 다른 ‘아버지’ 캐릭터는 시종일관 검정 스타킹에 하이힐을 신고 나오며, 종종 의미 없는 홍조나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성적 대상화되어 그려진다. ‘어글리후드’가 목숨을 구해준 후, 세뇌된 종교관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첫눈에 반한 남고생은 가끔 등장해 특유의 귀여움과 멍청함으로 분위기를 환기하는 도구 역할을 수행한다. ‘어글리후드’와 연대하는 네임리스 저항 집단에서 가장 강하며 모두가 존경하는 리더는 구성원 중 가장 작은 체구의 여성이고, 야수로 변하는 능력을 가진 캐릭터는 여성이며, 팀원을 치유해 주는 ‘힐러’는 남성이다.
이와 같이 <어글리후드>는 여성과 남성의 외형이 뒤바뀐 듯한 디자인으로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을 재현해 온 방식에 의문을 던진다. 또한, 이제껏 소년만화나 액션, 판타지 장르에서 여성 캐릭터에게 관행처럼 이뤄지던 노출 의상과 의미 없는 성적 대상화를 남성 캐릭터에 전가하며 젠더 클리셰를 비튼다. 캐릭터가 수행하는 역할 역시 성역할 고정관념에 맞는 경우를 찾기 어렵다. ‘여성성’을 모방하는 남성 캐릭터와 ‘남성성’을 모방하는 여성 캐릭터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캐릭터의 디자인부터 쓰임과 역할까지 미러링(영역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쓰이나, 본 글에서는 현 사회의 성차별적 면모를 역으로 재현하는 방식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 추가 예시는 이 칼럼을 참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직접적이고 일차원적인 방식으로, ‘남성의 몸을 성적 대상화하여 재현하는 것은 괜찮은가?’와 같은 질문을 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웹툰이 기존 소년만화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는 전개와 디자인에서 캐릭터 구성과 배치만으로 젠더 재현을 전복하며, 기존의 한정적 여성 재현과 왜곡된 섹슈얼리티 재현에 노골적인 반기를 든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나아가, 웹툰은 외계인이라는 존재를 통해 성별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지점이자 성별이분법의 틀에 균열을 내는 지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엘사와 동고동락하는 외계인 에리얼이 ’우리 종족은 성별이 없다‘는 말을 한 이후, 인간 소년의 외형을 한 외계인이 나와도 그를 남성으로 규정할 순 없는 부수적 효과가 생기는 식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어글리후드>가 남은 이야기를 통해 젠더 클리셰를 어디까지 비틀고 어떤 스펙트럼까지 확장해 나갈지 기대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