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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 knight Jun 21. 2019

모범생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완전한 모범생이었다.

학교를 빠지는 날도, 사고를 쳐서 부모님이 오시는 일도 없었다.

조퇴도 딱 한 번, 고등학교 때 감기에 심하게 걸려 정말 쓰러질 것 같아서 해봤다.

무서운 아버지 영향도 있었지만 어른들이 하는 말대로 하면 그냥 지내기에는 편했다.

심지어 칭찬받는 일이 많았다.

애초에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아예 하지 않는 습관도 생겼다. 

보통 문제가 되는 경계가 애매한 일들이 그러한데,

이것저것 따져가며 생각을 복잡하게 해야 할 상황 자체를 아예 만들지 않았다는 의미다.


덕분에 남녀공학 고등학교를 나왔으나 동아리 활동도 해보지 못했고 아는 여학생이 아무도 없다.

선생님들은 항상 공부를 강조했고 동아리 활동하면서 이성을 만나는 것을 몹시 경계했다.

당연히 공부나 운동밖에 할 일이 없었고 고2 때부터는 계속 장학금을 받았다.


당시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종종 삐삐나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는 친구들이 보이면 신기하기도 부럽기도 했고,

여자 친구와 통화를 하는 친구를 보면 "저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대학에 와서 이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는데

일단 밤 9시 이후에 선배의 전화를 받고 술을 마시러 간다는 것도 엄청난 일탈이었다.

물론 부모님은 놀라셨다. 저 녀석이 왜 저런담.

이제 더 이상 고등학생이 아니었기에 나는 내 안에 꿈틀대는 작은 욕망들을 조금씩 꺼내기 시작했다.

그 이후 대학생활은 공대생의 일상과 함께 했는데 그때까지도 나를 가두고 있는 큰 틀이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틀은 서른 살에 혼자 한 여행에서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냈던 것 같다.


왜 나는 여기를 처음 와보는 것일까?

왜 나는 다른 길은 쳐다도 보지 않은 것일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나도 모르게 생긴 울타리, 그것이었다.

타고난 성향, 가정환경, 교육 이런 재료들이 뒤섞여 내 주위를 둘러싸는 벽돌이 되어버렸다.

한 번 만들어진 이 틀은 살아가는 동안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사회에서 만난 친구 중에는 나와는 성장과정이 정반대인 친구도 있다.

어릴 때부터, 내 기준으로 보면 완전 양아치 같았을, 그와 말이 통하는 친구가 되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

나와 다르게 울타리가 없어 보이는 그들을 보면 가끔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 친구도 자신만의 벽이 있을 것이다. 내게는 잘 보이지 않지만.


나의 울타리 때문에 가끔은 스스로가 답답할 때도 있다.

확실히 규칙은 잘 지키는 것에 반해 갑자기 훅 들어오는 상황에는 머리가 빨리 돌지 못한다.

가끔은 고지식한 면을 보이기도 한다.

이제는 나의 이런 점들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 울타리를 한 번에 부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또 그것을 부숴버리는 것이 정답은 아닐 것이다.

다만, 오래된 성벽이 비와 바람을 맞이 하듯이

나의 울타리도 둥글게 마모되어 사회라는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면 족할 것이다.


#100일글쓰기 #비행 #모범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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