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니스가 남긴 마지막 네 번의 타격음은 차원이 달랐다
Rachmaninoff, Byron Janis, London Symphony, Antal Dorati – Piano Concerto No. 3
바이런 야니스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안탈 도라티의 묵직한 조력 아래 감상하며 나눈 시간은, 단순히 음악을 듣는 행위를 넘어 낡은 영화 필름 속에 봉인된 거대한 서사시를 한 장씩 실감 나게 들춰보는 경이로운 여정이었다.
처음 1악장의 문을 열었을 때, 나는 미국 태생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뜨거운 혈통이 흐르는 야니스의 강철 같은 타건에서 리히터를 연상케 하는 비장미를 발견했다. 35mm 영화용 필름에 담긴 머큐리 녹음 특유의 짙은 질감은 방 안의 공기를 밀도 있게 채웠고, 야니스는 그 속에서 왼손과 오른손이 마치 서로 다른 두 대의 피아노가 협연하듯 완벽하게 독립된 명료함을 선사하며 나의 귀를 사로잡았다.
이어진 2악장에서의 감상은 더욱 특별했다. 비장한 오케스트레이션이 문을 열면 어느 순간 그 두터운 장벽을 뚫고 들어오는 피아노의 소리는, 마치 차가운 빙판 위를 매끄럽게 지치는 피겨 스케이팅 선수의 날렵한 움직임과도 같았다. 바람같이 타고 흘러가듯 유연하고, 결코 서늘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그 묘한 온기는 마치 ‘따뜻한 얼음성’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역설적인 안도감을 주었다. 속도가 급격히 빨라지는 순간에도 음표들은 결코 뭉쳐지지 않은 채 제 존재감을 뽐냈고, 그 긴장감은 녹아내리는 얼음 위를 아슬아슬하게 흐르는 물처럼 유려하게 이어졌다.
3악장에 접어들자 사막의 지평선을 달리는 아라비아의 로렌스처럼 광활한 공간감이 펼쳐졌다. 야니스는 홀로 독주하는 대목에서도 박력 넘치는 건장함을 과시했고, 오케스트라는 그런 주인공의 뒤를 충실히 따르며 함께 질주했다. 특히 질주를 앞두고 잠시 숨을 고르며 속삭이듯 연주하는 서정적인 구간은, 무작정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전사가 아닌 주변을 달래며 전열을 가다듬는 지혜로운 영웅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소리의 밀도를 키워가며 채비를 마친 그는, 결국 다그치며 끼어드는 오케스트라의 기세마저 휘어잡은 채 주인공으로서 당당히 우뚝 섰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무아의 지점에서, 야니스의 연주는 망설임 없이 “좋았어!” 하는 쾌감과 함께 훅 하고 마지막 일격을 날리며 장엄한 마무리를 선사한다.
오늘 이 '맛있는 음감'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잠시 눈을 감고 야니스가 남긴 그 마지막 네 번의 타격음을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울려보는 건, 야니스가 남긴 마지막 네 번의 타격음이 나에게는 차원이 달랐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