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NWQhg0m9bU0?si=KIcN50wYj8_-ft0b
루지에로 리치와 말콤 서전트의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감상하며, 나는 그간 알았던 리치의 ‘악마적 기교’ 너머에 숨겨진 거장의 진면목을 발견했다.
1악장 서두에서 전해진 독주 바이올린의 톤은 결코 날카롭거나 신경질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짙은 브라운의 색채를 머금은 듯 중후하고 깊었으며,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연주에서나 느껴지던 서두르지 않는 농익은 여유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 유려한 흐름 속에서도 나는 그가 결코 기교를 잃은 것이 아니라, 매우 강한 발톱을 숨긴 채 곡을 장악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스피커를 통해 거실을 채우는 오케스트라의 퉁퉁 울리는 배경음과 뭉툭한 피치카토는 연주에 풍부한 입체감을 더해주었다. 이어 헤드폰으로 옮겨간 감상은 더욱 각별했다. 머리를 감싸듯 울려 퍼지는 2악장의 애절한 여운은 트레블을 살짝 높이자 비로소 숨겨진 화려한 광택을 드러냈고, 3악장의 갑작스러운 박력 속에서도 리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곡을 피날레로 몰아갔다.
결국 이 감상은 기교파 리치라는 선입견을 깨고, 절제된 힘과 묵직한 서정성이 만났을 때 전해지는 깊은 카타르시스를 온몸으로 받아낸 과정이었다.
오늘의 이 짙은 여운을 가슴에 담고, 내일은 이 거장이 들려줄 드보르작의 보헤미안적 색채 속에서 또 어떤 ‘숨겨진 발톱’을 찾아내게 될까? 무엇보다 내일 첫 음을 뗄 때, 데카 연주의 질감이 스피커와 헤드폰에서 어떻게 다시 피어날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