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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sa Aug 13. 2021

영혼 없는 왕자를 사랑한 인어 공주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 인어 공주

Igor Helal 님의 사진, 출처: Pexels

찌를 듯한 고통을 느끼며 인어 공주는 깨어났다.

왕자를 처음 만났던 백사장이었다. 왕자의 심장을 찌르지 못했고 물거품이 되었을텐데, 살아서 백사장에 누워있다니 어찌 된 일일까.

다리에 통증이 몰려왔다.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고통이 다시금 새로웠다.  바다의 거품이 되었던 다리도, 파도 같이 아름다운 머리카락도 모두 그대로였다.


그때였다.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던 사람, 그럼에도 이웃나라 공주와 식을 올렸던 왕자였다. 사랑을 속삭이던 칠흑 같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주는 불현듯 깨달았다.


'내가 마녀에게 목소리를 내어주고 두 다리를 받았던 그날로 다시 돌아온 거야. 신께서 나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준 거야. 이번엔 그를 절대 놓치지 않겠어.'


왕자는 죽기 전 처음 만났던 날처럼 인어 공주에 대해 물어왔지만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구나. 하지만 이번엔 뭐든 해야 해.'


인어공주는 왕자의 눈을 응시하며, 왕자가 물에 빠졌던 날과 똑같은 입맞춤을 했다.

아름다운 입맞춤이었다. 왕자는 이 당돌한 아가씨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랐지만, 익숙한 감촉과 숨결에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당신이군요. 바다에서 나를 구해준 은인”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는 놀란 듯이 그녀에게 말했다.


“말을 못 하나요?”


공주는 슬픈 눈빛으로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이제 내가 있으니까.”


둘은 다시 한번 서로를 바라보며 입을 맞췄다.

왕자와 인어 공주를 바위 뒤에서 몰래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바다 마녀였다.


“부디 이번 생에서는 사랑을, 그리고 영혼을 얻기를..”


     

왕자와 함께 왕궁으로 간 공주는 다리의 통증도 잊을 만큼 행복했다.

왕자는 공주를 익숙한 방으로 직접 안내하며 속삭였다.


“ 아름다운 그대여. 내가 말 못 하는 그대의 목소리가 되어줄게요.”


그리고 왕자가 또다시 물었다.


“글은 읽고 쓸 수 있나요? 그렇다면  그대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녀는 슬픈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공주는 인간의 글은 알 수 없었다.

바닷속에서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는지, 아름다운 손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시를 썼는지 그에게 알려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왕자를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공주에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이제 내가 그대의 말과 글이 되어줄 테니.”


공주는 왕자의 성에서 평안하고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왕자는 공주를 왕비로 삼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꼭 왕비가 되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바다의 물거품이 될 거야.'


공주는 마음이 조금 급해졌다.

어느 날 왕자는 평소보다 더 화려한 옷을 입고 인어 공주를 찾아왔다.


“아름다운 그대, 나는 여행을 떠나야 해요. 나를 진짜 살려준 은인을 찾아냈어요. 바로 이웃 나라 공주랍니다. 나는 그녀와 결혼을 하려고 해요.”


이게 무슨 말이지? 공주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며 자신을 가리켰다.


“나를 살려준 은인이 당신이라고 말하는 건가요?”


공주는 있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는 그녀를 꼭 안은 채로 귓가에 속삭였다.


“나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조용히 있는 게 좋을 거예요. 어차피 말도, 글도 모르는 당신은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지만. 걱정하지는 마세요.  결혼한다고 해도 버리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단지 이웃 나라 공주와의 결혼이 필요한 거니까요.”


왕자가 겨울의 바닷물보다도 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을까? 내 목소리를 바치고 내 꼬리를 바친 그 사람. 그는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을 뿐 마음은 바닷속 마녀보다도 더 얼어있구나.

그녀는 깨달았다. 공주가 사랑한 왕자는 겉모습뿐이었다는 것을. 왕자는 상냥하지만 흉측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이 나라의 왕자예요. 누구든 한 명쯤 물거품으로 만드는 건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조용히 지금처럼만 있는다면  원하는 건 뭐든 얻으며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거예요.”


공주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이렇게 있다가는 진짜 물거품이 되어버릴 운명이었다. 공주가 원하는 것은 오직 사랑으로 얻을 수 있는 영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마저도 필요 없게 되었다. 왕자는 인어 공주가 보아왔던 생명 중 가장 영혼이 없는 존재니까. 이제 그녀는 알았다. 인간이라고 모두 영혼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모든 것을 다 포기한 듯한 그녀를 보고 왕자는 흡족해했다. 자신의 말을 다 알아들은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다음날 왕자는 이웃 나라의 공주를 만났다. 그리고는 행복해서 죽을 것 같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소리쳤다.

 

“당신이었군요! 내가 죽은 듯 바닷가에 누워있을 때 나를 구해준 사람!.”


왕자는 세 치 혀로 거짓된 고백을 쏟아내며 얼굴을 붉히는 이웃나라 공주를 두 팔로 안았다. 그녀는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영악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왕실의 사랑이란 이런 것이니까. 백성들이 좋아할 만한 가십, 스토리, 그거면 되었다. 진실한 사랑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인어 공주는 거짓된 둘의 사랑을 보며 역겨움을 느꼈다. 이제 그녀가 할 일은 명확했다. 영혼 없는 인어가 영혼 없는 인간에게 할 수 있는 복수.


왕자와 이웃나라 공주의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다.

그리고 그날 저녁 신부와 신랑은 배를 타러 갔다. 인어공주와 성안의 사람들은 두 신혼부부를 축하하기 위해 배에 올랐다. 그날 밤 인어공주의 언니들이 그녀를 찾아왔다.

언니들은 바다에서 물결치던 아름다운 머리카락과 바꾼 마녀의 칼을 인어공주에게 쥐여주며 말했다.


“왕자의 심장에 이걸 꽂아야 해”


Matt Hatchett 님의 사진, 출처: Pexels


그녀는 망설임 없는 눈빛으로 칼을 받아 들었다.

인어 공주는 왕자와 그의 신부가 있는 보라색 천막을 열었다. 왕자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그의 긴 속눈썹을 바라보니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그의 목소리와 눈빛이 아른거렸다. 그러나 왕자는 자면서 그 낮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신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의 마음속에 이미 인어 공주는 없었다.

인어 공주의 손에 든 칼날이 분노로 바르르 떨렸다.


“사랑이 없는 텅 빈 영혼의 심장이여. 이 단도의 칼집이 되어주렴”


공주는 망설임 없이 왕자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갈비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왕자의 심장에서 솟구친 피가 그녀의 두 다리를 적셨다. 그때였다. 그의 아름다운 공주가 살며시 눈을 떴고 겁에 질린 눈빛으로 죽어가는 왕자와 인어 공주를 쳐다보았다.


“사. 살려주세요. 당신이 왕자를 구해준 사람이라는 사실 알고 있어요. 그가 말했거든요. 죽어도 싼 인간이에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인간의 사랑이라는 게 고작 이런 거였다니.

이제 원망이나 두려움은 남지 않았다.


'미천한 것들.'


 죽은 왕자와 신부를 남긴 채로 그녀는 방을 나섰다. 두 다리가 인어의 꼬리로 돌아오기 전 재빨리 공주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바다에 몸을 맡기자, 공주의 아름다웠던 은빛 꼬리가 돌아왔다. 공주는 꼬리를 조금 움직여 본 후,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내보았다. 아름다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 배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왕자가 피살되었다!”

“그 벙어리 여자예요! 배은망덕한 그 여자가 왕자를 죽였어요”


신부의 찢어질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리석은 것. 인간들은 끝까지 그녀를 실망시켰다.

인어 공주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그 긴 시간 동안 인간들에게 하지 못했던 말들이 노래가 되어 울려 퍼졌다.

그녀가 어떻게 다리를 얻었는지, 얼마나 왕자를 사랑했는지. 그리고 왕자가 자신 어떻게 버렸는지.


인어의 노래에는 마력이 있다.

인어가 행복의 노래를 하면, 듣는 이들 모두 기쁨의 격정에 휩싸이지만, 슬픔을 노래하면, 노래를 멈출 때까지 영원히  깊은 감정의 웅덩이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아름답고 구슬픈 그녀의 목소리에 왕자의 신부가 먼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명씩 넋을 잃고 인어 공주의 노래에 빠져들었다. 하던 일을 멈추고 모두 우두커니 노래에 빠져들어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노래는 인간들의 영혼에 스며들었고 인어 공주가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면 영원히 물거품처럼 침식해 그들의 몸뚱이는  비어버릴 것이다.

그때였다.

인어공주에게 다리를 내주었던 마녀가 헤엄쳐왔다.


“이제 그만해도 된단다.”


마녀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자 공주는 노래를 멈추었다.

마녀는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설명했다.


“인어의 수명은 삼백 년,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한 채 죽은 인어에게는 단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진다.

어리석은 왕자가 모든걸 망쳤구나. 너에게 사랑을 내어 주었다면 너의   수명을 나눠 받을  있었을 텐데.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말해주마. 인어를 진정으로 사랑한 인간은 영혼을 나눠주는 대신 인어의 수명을 나눠 받는단다. 하지만 왕자는 영혼이 텅비어서 사랑할 가치가 없는 인간이었구나. 가끔 인간들 중에도 빈껍데기 같은 자들이 있단다. 너무 슬퍼하지 마렴.  ”


인어공주는 인간들의 배를 남겨둔  마녀의 손을 잡고, 깊은 바닷속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인어 공주는 자신의 왕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깊은 어둠이 있는 마녀의 동굴에 터를 잡았다. 마녀와 함께 인간을 향한 사랑과 영혼을 갈구하는 인어들에게 다리를 선물하는 일을 하기로 했다.  대가로 아름다운 노래를 하는 , 보석같이 빛나는 눈동자 그리고 아름다운 연주를 하는 손가락을 받기도 했다. 결핍은 항상  사랑이 진짜인지 깨닫게 해주곤 했다.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나고 가여운 인어가 사랑의 허무함을 알게 되면 되돌려주었다.


인어 공주는 세월이 갈수록  더욱 사랑을 믿지 않게 되었지만, 언젠가는 진정한 사랑을 찾아 영혼을 얻은 인어가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인어의 삼백 년 인생 동안 마녀와 인어 공주가 영혼을 얻은 인어와 삼백 년의 삶을 사는 사랑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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