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만에 재취업한 마흔두살 경단녀 리사씨 2편
리사씨는 입사 3시간만에 커다란 철학적 진리를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기억하고 싶은것만 기억한다는 것이다.
리사씨에게 '회사'란 첫사랑 처럼 아련한 그 무엇이었다. 사원증을 휘날리며 한손엔 스타벅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강남으로 출근하던 젊은 날의 그리움이었다. 점심엔 강남일대롤 돌아가며 맛집을 찾아다니고, 3~4시 졸음이 몰려올 시간이 되면 사내 카페에서 동기들과 수다를 떨던 기억들만 생각났다. 그래서 리사씨의 꿈에는 그때 그시절의 회사가 자주 등장했다. 꿈에서 리사씨는 아직도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그리운 동료들 옆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리사씨는 출근 3시간만에 깨달았다. 인간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는 것을 말이다.그녀는 회사의 아름다웠던 기억만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시간만에 리사씨는 전업주부로 살때 단한번도 느끼지못했던 위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입사 두시간만에 직장인의 만성질병이라는 스트레스성 위염을 획득하게된 리사씨는 사무실을 두리번 거리며 직장인의 장점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점을 찾는다면 왠지 복통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일단... 카누와 맥심이 무제한 무료였다.
집에서는 이마트 특별 할인기간에 키친타월을 껴줄때만 쟁겨두던 인스턴트 커피가 일단 무제한이었다.
비품함을 열어보았다. A4용지가 무료였다. 그것도 집에서는 비싸서 절대 구입하지 않던 무려!! 더블에이었다. 직원들은 더블에이에 컬러프린터로 마구 마구 인쇄를 하고, 회의가 끝나면 갈아버리는 전업맘은 상상도 못할 플렉스를 누리고있었다.
A4용지 옆에는 캐비넷이 있었다. 그 안에는 포스트잇과 알파문구 매대 앞에 놓여있던 각종 볼펜 들이 이열종대로 누워있었다. 리사씨는욕심껏 볼펜과 형광펜을 챙겨 자리로 돌아왔다.
게다가 점심시간엔 무려 구내식당에 갈 수 있었다!! 전업맘들은 이야기 했다. 아파트마다 구내식당이 있어서 아침, 점심, 저녁을 배식해줬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리사씨가 간과한게 있다. 짬밥은 짬밥일뿐..
팀원들의 궁시렁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아.. 씨.. 바뀐 급식 업체 진짜 구려.. 기본이 안되있어! 김치가 고춧가루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날거 같아. "
사실 그날 리사씨에게 음식맛은 의미가 없었다. 이미 스트레스성 위염을 두시간만에 획득한 리사씨는 구내식당에서 플라스틱 식판에 담긴 환경호르몬 김칫국(전업주부 리사씨는 환경호르몬 걱정에 절대로 플라스틱 식기를 사용하지 않았다.)을 아무리 퍼먹어도 맛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고, 밥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점심밥을 먹을때까지 리사씨가 직장에서 찾은 장점은 단 세가지였다.
무제한 인스턴트 커피, 무제한 더블에이 그리고 무제한 문구류!
김치가 고춧가루를 털고 일어날법한 구내식당밥을 먹고 자리에 돌아온 리사씨는 남은 점심시간동안 은행앱에 접속해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신용카드를 만들며 리사씨는 조금 즐거워졌다. 더이상 연간소득 600만원 이하에 체크 하지 않아도 되었고 '무직'이나 '가정주부' 가 아닌 '직장인'에 체크 할 수 있었다.
회사이름과 회사 주소를 넣으며 리사씨는 아주 잠시 뿌듯해졌다.
아주 잠깐 세상에 필요한 누구인가가 된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카드를 만들고 한시가 되자 리사씨에게 업무라는 현실이 하나둘씩 시작되기 시작했다. 일단 사내망에 접속해 이런저런 시스템에 접속하는 것을 배웠다. 리사씨와 띠동갑인 김주임이 리사씨를 도와줬다.
"과장님. 제가 딱 한번만 알려드릴꺼예요. 잘 보고 기억하세요"
당연히 딱 한번만 보고 절대 기억할 수 없는 노안을 앞둔 리사씨는 여러번 김주임을 귀찮게 굴었고,
"아까 해봤잖아요 왜몰라요?" 라는 반말같은 존댓말로 김주임에게 면박을 당하며 살짝 기분나빠졌지만, '나는 꼰대가 아니야'를 마음속으로 되뇌이며 아무렇지 않게 컴퓨터를 하는 척 했다.
다음 리사씨를 괴롭힌건 '엑셀'이었다.
왕년에 엑셀 함수로 우주비행선도 날릴 수 있을 것 같던 리사씨는 이제 없었다. 리사씨는 회사원의 절친 '브이룩업 함수'도 제대로 시전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그녀는 신입보다 못한 경력직이었던 것이다. 옆자리의 김주임이 눈을 감고 엑셀 함수를 날리는 것을 보며 역시 젊음은 다르구나를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퇴근길에 리사씨는 본인의 왜곡되어있던 '회사'에 대한 이미지의 정합 과정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생각났다.
마시기 싫던 술을 따라주던 대머리 팀장, 오전 8시 20분의 3호선의 지옥철, 야근과 주말 근무, 그리고 한팀에 꼭 한명씩 있던 또라이 직원들. 갑자기 기억상실증 환자 처럼 잊고 있던 회사의 악몽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리사씨는 알게 되었다.
이미.. 되돌리기는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