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재취업한 마흔두 살 경단녀 리사씨 4편
10년 만에 재취업한 마흔두 살 경단녀 리사씨는 아주 오랫동안 전 직장 동료들과 연락을 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옛 드라마의 주인공이 고향에 그랜저를 몰고 금의환향하듯, 사표를 던지고 나왔으면 좀 더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같아서였다.
퇴사 후 아이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리사 씨는 자주 우울했다.
어쩐지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에 왠 낯선 중년의 여자가 보였는데, 푸석거리를 머리카락, 늘어진 옆구리살 그리고 탑텐에서 작년 여름 1+1 세일 때 구매했던 티셔츠. 자신이 마치 거대한 유니버스 작은 한켠에 굴러다니는 휴지조각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우울한 리사 씨에게는 SNS 공포증이 있었다.
폐쇄공포증 환자들이 좁은 엘리베이터에서 숨을 쉴 수 없듯, SNS에 접속하려는 시도를 할 때마다 리사씨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가끔 피드 되는 인스타의 게시물 속에서 옛 동료들은 여전히 힙한 와인바에서 돔 페리뇽을 땄으며, 오마카세를 즐겼고, 자주 해외여행 사진을 올렸다. 호텔 야외 수영장에서 정갈하게 관리된 발가락과 스파클이 일렁이는 샴페인, 그리고 샤넬과 보일 듯 말 듯 보이는 벤츠 엠블렘 사진 아래 댓글을 쓸 자신감이 없었다. 리사씨는 인어공주처럼 물거품이 되어 SNS 계정에서 사라졌다. 몇 년간 접속하지 않은 페북과 인스타에서 동료들의 업로드 메일이 올 때마다 리사씨는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바로 이 SNS 공포증 때문에 리사씨는 잠수 아닌 잠수를 타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전화번호를 바꿨고, SNS를 하지 않다 보니 자연히 전 직장 동료들과는 연락이 두절되었다. SNS 공포증은 최근까지 이어졌다.
재취업한 지 2주쯤 흘렀을 무렵이었다.
거래처 회의에 다녀온 팀장이 말했다.
"리사씨 전 직장이 주식회사 대왕이었죠? 어제 대왕기획팀이랑 미팅을 했는데, 우리팀에 대왕에서 일하던 직원이 새로 왔다고 했더니, 거기 박 부장이 조금 듣더니 리사씨와 동기였다고 하더라구요.리사씨 번호를 알려달라기에 내가 알려줬어요. 세상 참 좁아~"
팀장이 만났다는 주식회사 대왕의 기획팀 부장은 전 직장의 회사 동기였다. 벌써 리사씨의 동기들은 부장이 될 나이었던 것이다. 어디 부장뿐이랴. 리사씨의 절친 지영씨는 똑부러지게도 비혼주의자를 선언하더니 스타트업 회사의 개국공신이 되어 벼락부자가 되었다.
왠지 리사씨는 팀장이 준 박부장의 번호에 차마 전화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다음날 박 부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회의하러 근처에 왔다는 반가운 목소리였다.
일층 커피숍에서 10년 만에 동기를 만난 리사씨는 하마터면 박 부장을 못 알아볼뻔했다.
별명이 강동원이었던 그의 몸은 두배로 불어있었고 이마는 반쯤 벗겨져있었다. 아마 길에서 봤다면, 아니 식당 옆자리에서 만났을 지라도 리사씨는 박 부장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리사씨는 신입사원이었던 18년 전처럼 박 부장과 수다를 떨었다. 그 순간만큼은 10년 만에 재취업한 마흔두 살 경력 단절되었던 리사씨도 아니었고, 18년 차 배 나온 박 부장도 아니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신입사원처럼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리사 씨는 마음속에 단단히 뭉쳤던 무엇인가가 살짝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박 부장과의 대화를 시작으로, 리사씨는 옛 동료들에게 용기를 내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연락을 시작하며, 리사씨는 그녀 주변에 단단히 쳐져있던 담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쳐놓았던 단단한 외벽은 그녀가 만들 허상의 울타리였다. 이십 대의 리사씨는 이미 마흔을 넘어있었고, 선배들은 오십을 바라보거나 이미 넘어있었다. 그럼에도 신입사원이었던 그 때 그 마음으로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 선배는 집 나간 동생이 돌아왔다며 전화에 대고 소리 질렀고, 리사 씨는 왠지 울컥해서 솔직해지고 싶었다.
"사실, 멋지게 연락하고 싶었어요. 나 회사 나왔지만 이렇게 잘 나가고 있다. 이렇게요. 사업을 하거나 소설가가 되있거나. 그런 모습을 상상했거든요. 그런데 내가 원하는 나는 이렇게 큰데 진짜 내 모습은 너무 작아서, 연락을 드리기 무서웠어요"
"그런 게 어디 있니. 너를 좋아하는 이유는 어떤 회사에 다녀서도, 어떤 직함을 가지고 있어서도 아니야. 그냥 너를 좋아한 거야. 리사야. 보고 싶다. "
리사씨는 왠지 울컥해져서 전화를 빨리 끊어야 했다.
이렇게 리사씨에게 단단히 한계를 만들어 주고 있던 벽이 너무도 쉽게 와르르하고 무너져버렸다. 이제 더 이상 SNS가 무섭지 않았다. 옛 동료들과의 대화가 두렵지 않았고, 내 존재가 작은 휴지조각 같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옛 동료들이 올리는 사진들이 더 이상 무거운 돌덩이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리사 씨는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리사 씨를 초라한 경단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리사씨는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올리는 화려한 사진 아래 숨겨져 있는, 10년이라는 치열한 직장생활을 말이다.
그냥 다른 삶을 살았을 뿐이다. 그들은 회사에 남아 치열한 삶을 살았고, 리사씨 역시 아이들을 택했고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옳고 그름이 삶에 어딨겠는가. 동기 박 부장에겐 박부장의 인생이 리사 씨에게는 리사씨의 인생이 있을 뿐.
리사씨는 몇년간 움츠렸던 어깨가 펴지는 것이 느껴졌다.
세상에 초라한 인생이 어디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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