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친구에게 감히 물어본 질문.
미국에서 ESL 과정을 다니며, 가장 편하게 수다를 떨었던 사람들은
역시 '엄마'들이었다.
교육이나 육아 이야기가 나오면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여 우리는 수다 삼매경이었다.
남편과 시어머니 이야기가 나오거나 아이들 이야기가 나오면.
우리는 그냥 '엄마'와 '아내'가 되었다.
아내들은 하나같이 남편이 핸드폰을 손에서 내려놓지 않는다고 흉을 봤다.
"요즘 남편들한테는 WIFI 가 WIFE 라니깐~"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아내들이 끄덕였다.
한 친구는 수첩에 받아 적었다.
WIFI IS HIS WIFE.
ESL 수업에 다니며 영어를 배우러 갔다기보다는
세상의 엄마들과 수다를 떨기 위해 갔던 것 같다.
그중 유독 시간이 지나도 내 마음에 남는 사람들은 이슬람 국가에서 온 여자 친구들이었다.
처음엔 히잡을 쓰고 있다는 이유로 가까이 하기가 어려웠다.
나와는 다른 가치관을 갖은 사람들이라고 처음부터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한국 엄마 아닌가.
미국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수학,
특히 연산을 잡는 비법을 알려주며 그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세계의 문화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는 시간이었다.
그때는 정말 많이 친해져서 거리감 없이 이것저것을 묻곤 했던 시기였다.
"너희 이슬람은 일부다처제잖아. 정말 가능해?"
"응 맞아. 남편은 두 번째 부인을 얻을 수 있어"
"정말? 그거.. 정말 괜찮다고 생각해?"
팔레스타인 친구는 잠시 눈빛이 흔들리더니 책상 아래로 주먹을 쥐고 대답했다.
...
"MAYBE.. I WILL KILL HIM"
우리는 함께 크게 웃었다.
그냥 갈수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살 때 옆집에 사는 언니나 아랫집에 살던 동생이랑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히잡을 쓰고 있고
나는 팔뚝이 허옇게 드러난 민소매를 입고 있었지만.
그냥 그녀는 나에게 김지영이었고 이소영이었다.
"결국 세상 사람들은 비슷하구나"라는 것을 느끼고 있을 때쯤
또 "세상은 불공평하구나"를 느낀 순간이 있었다.
"LISA 너는 경영학을 전공했다며 정말 좋겠다.
나는 미국에서 영주권을 따서 고등학교 졸업증을 따는 게 꿈이야."
팔레스타인 여자 친구가 불현듯 말했다.
그녀의 사연은 이러했다.
오빠가 미국에 영주권이 있어서. 남편을 두고 자신과 아이만 몇 년째 미국에 와있다고.
본인이 영주권을 따야 남편도 올 수 있어서 현재 몇 년째 남편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고.
이제 남편은 포기하고 팔레스타인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하고 있다고.
"우리 아들은 본인 반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선생님께서 매일 칭찬하셔.
그런데 말이야. 남편이 원하는 대로 내가 만약 팔레스타인에 가잖아?
우리 아이는 이제 학교 조차 다닐 수 없어. 거기엔 학교가 없어...
LISA 너라면 어떻게 할 거야?
남편에게 갈 거야? 여기 남아있을 거야?"
나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의 나이 이제 26살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권유와 아들의 미래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그날 밤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남편은 아주 쿨하게 대답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 더 이상 체류가 허락되지 않는 다면 뭐.. 돌아가야지"
법이나 이성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해야 했겠지만
엄마로서.
26을 살아본 여성으로서
나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나는
우리가 그렇게 비난했던 '불법체류'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와 이야기할 때면
참으로 영특한 친구구나 매번 느낄 수 있었다.
3개 국어 이상에 능통했고. 영어 역시 별다른 악센트 없이 네이트브처럼 편하게 대화했다.
가끔 그녀가 영어 문법을 나에게 물어볼 때면 아주 작은 힌트에도 빠르게 습득하는 그녀를 보며
세상은 그렇게 공평하지 않구나 새삼 느끼곤 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오고 몇 달 뒤
그녀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건너 들었다.
그녀와의 인연 후로
나는 일부러 팔레스타인 뉴스를 찾아보곤 한다.
강 건너 불구경이었던 너무 먼 낯선 나라에 작은 인연의 끈이 남아 있다는 이유 만으로.
그녀의 영특한 아들은 학교에 다니고 있을까?
그녀가 그렇게 부러워하던 공부를 계속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