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1. 애씩이나 키우는 거겠지
사직서를 제출했던 날이 떠오른다.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극적이진 않았다.
시크한 정장을 입고 사직서라고 궁서체로 겁나 멋지게 쓰여있는 하얀 봉투를 재킷 안쪽에서 꺼내지도 않았다.
츄리닝 바람으로 머리를 질끈 묶고, 늦은 저녁 동네 치킨집에서 인사 담당자를 만났다.
어쩔 수 없었다. 그 당시 나는 육아휴직 중인 애 엄마였으니까.
뭐 그도 마찬가지였다. 엄청나게 바빠서 그 시간만 잠깐 짬을 낼 수 있는 인사 담당자 님이었으니까.
망고 생맥주 두 잔을 시켰던 걸로 기억한다. 누가 돈을 냈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각자 한잔씩을 홀짝이며 나는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인사 담당자는 나보다 오 년 정도 후배였고. 연락하다 보니 인연인지 우리 아파트 주민이었다.
망고 맥주의 알딸딸함 덕분이었을까.
처음 만난 그는 인사담당자가 아닌 인간대 인간으로 나에게 아낌없는 조언을 퍼부었다.
과장님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과장님 나이에 이제 이런 직장 못 구해요.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후배님은 오늘 몇 시에 퇴근하셨나요?"
이렇게 멋지게 답하고 시크하게 돌아섰지만,
그가 정말로 진심 어린 조언을 했다는 것은 몇 년이 흐른 뒤 알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감이 차고 넘쳤던 나는.
어디든 취업할 자신이 있었고, 뭐 안되면 사업이나 해보지.
안되면 공부해서 다시 대학 가서 선생님이나 하던지.
아님 이참에 회계사나 따 보던지.
이 정도 수준의. 현실도. 나 자신도 전혀 모르는 똥 멍청이였으니까.
내가 그때 잡코리아라도 들어가서 한국 평균 기업의 연봉이 얼마나 낮은지.
알바몬에라도 들어가서 현재 최저임금이 얼마인지.
대학교 4학년 생들에게 인터뷰라도 따서.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이야기라도 해봤으면.
당장 책꽂이 맨 위에 꽂혀있는 먼지 수북한 재무회계 책이라도 한번 꺼내보고 내 머리가 얼마나 돌이 되어있는지 깨달았다면
나의 생각이 지니의 요술램프 수준의 픽션임을 알았을 텐데 말이다.
브런치에서 읽었던 공채형 인간에서 봤듯.
나는 대기업에서 요리조리 잘 요리 하기 편리한 공채형 인간,
혹은 양산형 대기업용 인간에 불과했다.
**기업 과장 ***이라는 명함 외엔 나를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영어를 끝짱 나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회사에 다니는 동안 영업의 전략을 배운 것도 아니었다.
고객을 직접 대면해 본 적도 없고.
그저 현장은 쥐뿔도 모르면서 책상에 앉아 기획서나 싸지르는
그저 주어진 일만 꾸역꾸역 해대는 대기업 공채로 뽑힌 수동적 인재였다.
회사에 들어가기 전에도 치열한 적이 있었던가.
친구들이 매일 흑역사를 갱신하며 어두운 공부방에서 츄리닝에 삼색 슬리퍼를 신고 회계사 준비를 할 때
나는 바람의 딸이 되어 지구 곳곳을 싸돌아 다녔다.
인생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는 년이 겉멋만 들어서 인새의 해답을 찾겠다며 인도로 향하질 않나..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이탈리아 판테온 기둥에 기대서 쳐 자빠져 자기나 했다.
습자지처럼 얇지만 아는 척에는 능통했던 다양한 잡기로 몇몇 공모전에서 수상했으며
나 자신을 꽤 괜찮은 사람으로 포장해서 괜찮은 대기업들에서 인턴이나 대학생 프로그램에도 붙었다.
세상은 그것을 스펙이라 불렀다.
예쁘게 잘 포장된, 인사담당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럴듯한 취준생의 스펙.
한마디로 나는 모난 곳 없지만 특징도 없는
미니언즈의 밥이나 캐빈보다도 더 특징 없는 양산형 대기업형 인간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나는 캐릭터 이름조차 없던 미니언즈 125번 이라고나 할까?
그런 스펙으로 대기업에 두 군데 붙었을 땐 나는 내가 정말로 제일 잘 나가는 줄 알고 있었다.
이제 예전의 내가 아님을 간과하고 사직서를 썼던 그날의 오만을 안다.
과장님. 이제 과장님 나이에 이런 직장 못 구해요.라는 오 년이나 늦게 회사에 들어온 후배의 충고가 진심이었음을 알게 되어버렸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것이 정말로 경력 단절의 날이었음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사직서를 내려는 그 순간 나는 냉철하게 깨달아야 했다.
사직서와 함께 나의 이름에는 경력단절 여성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닐 것임을.
왜냐면. 나는 양산형 인재에 불과했으니까.
그렇게 내가 경력단절 여성인지 조차 모르던 나는
둘째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자 현타의 파도에 휩쓸렸다.
남편을 따라 지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잊고 있었지만
서울에서 내가 어릴 적 살던 동네에 전세라도 살려면 6억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며.
아직까진 잘 굴러가던 14년이나 된 내 차를 바꾸려면
적어도 4천만 원은 있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건. 어떠면 이제 어떤 회사도 나를 다시 받아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이었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기저기 원서를 냈다.
토익점수도 갱신했고, 한국사 1급도 취득했다.
그때 했던 대로 다시 하면 그들이 다시 나를 받아주리라 착각했다.
내가 회사 다닐 때 했던 일들을 다시 정리하고 이력서를 만들었고,
이력서를 쓰다 보니 다시금 꽤나 내가 괜찮은 인간이 된듯했다.
그럼에도
"귀하의 뛰어난 역량과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과 아주 조금 달라 아쉽게 돼 탈랐되었다는" 탈락 이메일만 쌓여갔다.
나의 눈은 점점 낮아졌고,
시간제 무기계약직 사무직에 자리에서 떨어지고 괴로워하던 날 나의 절친한 친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너 같으면 차장 나이의 여자 사람을 사무직 사원으로 뽑겠니? 어디 부담스러워서 전표처리라도 시키겠어?"
나는 그날을 마지막으로 이력서를 그만 쓰기로 했다.
이제 나의 양산형 인재로의 경력은 정말 끝이 났음을 '인정'해야 했다.
이십 대의 나는 사라졌음을. 그리고 나는 마흔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이제는 정말로 쿨하게 과거와 안녕을 고해야 했다.
하지만. 과거와의 안녕은 꽤나 힘들었다.
왕년에 잘 나가던 노숙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 현타의 쓰나미는 작년 초 몇 개월이나 나를 덮쳐서 몸과 마음을 꽤나 힘들게 했다.
이래서 아홉수라고 하는 건가..
나름 화려했던 삼십 대를 보내야 하는 서른아홉의 나는 끈질기게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경단녀가 된 나를 인정하기 힘들었다.
몇 달간 아니 몇 년간이었던가..
그렇게 끙끙 앓고 나서 깨달은 바는.
나란 인간은. 이렇게 후회하면서도..
그럼에도 말이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비슷한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까 싶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
육아와 커리어의 병행을 선택한 세상의 맞벌이들이 틀렸다는 말도.
육아를 선택한 내가 옳다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때는 상황이 그랬던 것일 뿐이다.
그냥 그때의 나에게는 그게 최선이었을 것이라는 나만의 위로이다.
경단녀가 되었다는 현타의 쓰나미 속에서 바다에 가라앉았다 올랐다를 수없이 반복한 후
어느 날 눈떠 보니 느낀 것은
'그때로 돌아가도 나는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그래서 나는 외친다.
"이제 양산형 인재 따위로는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뭔가 새로운 시작이 필요했다.
그런데 내가 해야 할 일은 뭐지?
중3 때 나의 성적에 맞는 어중간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3 때 나의 진로는 수능점수 대조표에 맞는 대학에 맞춰졌다.
대 4 때 나의 진로는 대기업 연봉 순위에 맞춰져 있었다.
그럼 나의 다음은 뭘까.
태어나서 진심으로 순수한 나 자신에 초점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젊을적 내내 외치던게 자유 아니던가.
그런데 이상하다. 남들이 바라는 내가 아니라 내가 바라는 내가 뭘지에 초점이 맞춰지자 머리가 어지럽다.
어라.. 내가 원하는게 뭐였지?
코페르니쿠스 적 사고가 필요하다. 어쩌면 反코페르니쿠스적 사유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원하는 나를 맞춰 갔는데 이제는 내가 원하는 나를 만들어야 한다.
갑작스런 사유의 자유 앞에 공황이 몰려온다.
지금까진 가야 하는 길로 열심히 가면 칭찬받았는데, 이제는 내가 정말 가야할 길로 떠나야 할 시점이 온것이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나이 마흔에 정말로 가야 할 길을 찾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