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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글 Sep 25. 2019

생선 비린내를 이해할 줄 아는 사람

작년 여름에 일본 여행을 갔더랬다.(경제 보복이 있기 함 찬 전의 일이다.) 나의 여행은 국내외를 따지지 않고 몹시 고되다. 내게 여행은 일상보다 복잡하며, 육체적 피로가 따른다. 여행을 단순히 휴양이라 생각한다면 나의 일본 여행에 꽤 많은 사람이 의아해 할지도 모른다. 우선 육지 한가운데에서 어촌마을로 가는 일정이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국의 지리로 따지자면, 서울에서 부산을 가는 정도다. 아니, 이보다 더 어려운 길이다. 애초에 처음 가보는 곳이고, 모국어도 들리지 않는 일본의 깊숙한 곳까지 거슬러 오르기 때문이다.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묻는 친구도 있다. 나는 애써 답하려 하지 않고, 되려 나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도 그것이 몹시 궁금했기 때문이다. 너는 왜 그리 힘든 여행을 즐기니, 누가 알아주기라도 하니?


힘든 여행에서 은근히 얻어지는 게 몇 개 있다. 대단히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쉽게 포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확하게는 발견에 있다. 발견엔 남다른 시선이 필요하다. 남다른 시선은 예사롭지 않은 여행에서 마련된다. 모르는 곳, 잠깐 정신을 놓으면 길을 잃는 곳, 그래서 나 혼자 이 세상과는 동떨어진 사람이 될지도 모르는 곳. 내가 배워온 게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지는 곳. 이런 조건들이 전제되어야 나의 시선은 평소보다 조금 달라진다. 그때가 되면, 사소한 것에 신경이 쓰이곤 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지금 하려는 이야기처럼.


이렇게까지 완벽히 길을 잃었던 적은 없었다. 우선 여행 책자에서 알려 준 정보가 실제와 달랐다. 무언가 바뀌었고, 잘못되었다. 나는 시골의 어느 마을에서 시내버스를 탔다. 이 버스가 나를 내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줄 것이란 일말의 희망보단, 잠시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었고, 될 대로 될 일은 어떡하든 되겠지 하는 무분별한 무기력에 기반하는 행동이었다. 한국에서 그것도 평일에 출근하면서는 절대 할 수 없는 행위였으나, 여기선 그 누구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다만, 약간은 한국이 그리워 뭐라고 할 사람이 한 명이라도 옆에 있었으면 하는 쓸쓸함도 동시에 견뎌야만 했다. 버스 안은 온갖 대화들이 엉켜있었다. 어떤 대사들은 채 마무리가 되기도 전에 끝이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외국어였다. 우리나라의 한적한 시골마을에서나 들려올 법한 어르신들의 둘쑥날쑥한 어조와 거의 비슷했다. 어떤 의미인지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나는 대충 이렇게 해석했다. “어디가 슈?”, “시장에 장이 섰다길래, 우리 양반 먹이려고 뭐라도 사러 가지.”, “그 봉지는 뭐시여?”, “기사양반 내 귀가 안 들리니 거기 도착하면 크게 불러줘.” 이것이야말로 남다른 시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사실 이 버스가 도심으로 갔으면 하는 약간에 희망을 품고 있었으나, 기대완 달리 한없이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정말 이러다 큰일이 나지 않을까 싶어 심히 걱정스러웠다. 한 여름이라 이마나 귀 밑으로 땀이 흘렀지만, 단순히 더위를 느껴 흐르는 땀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심장이 쿵쿵 뛰어댔고, 불안은 어르신들의 만담에 맞춰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는 것 같았다. 나는 가방을 가슴 앞으로 꺼내, 지퍼를 열었다. 호텔 체크아웃 시간을 맞추기 위해 대충 쑤셔 넣은, 속옷과 와이파이 도시락이 내 불안의 근거처럼 쏟아졌다.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커, 흠칫 놀라며 어르신들을 둘러봤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만담의 향연이었다.


나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짐을 쥐었다. 그때였다. 한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초조하거나 불안할 때, 어떤 대상에 의존하거나 위안받길 원한다. 그 대상은 대개 자신보다 더욱 불안해 보이는 사람이어야 한다. 내 시야에 들어온 할머니 역시 어딘가 몹시 불편해 보였다. 연신 발바닥으로 바닥을 쓸어댔다. 가슴팍엔 검은 봉투가 있었다. 연신 봉투를 이리저리 살피는 것으로 보건대, 불안의 근원은 저 정체 모를 검은 봉투에 있는 것 같았다. 봉투의 상태는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봉투가 어떤 것인지 한눈에 알아봤다. (내가 사는 곳은 오이도 근처인데, 가끔 오이도발 버스에 할머니들이 자주 저런 검은 봉투를 들고 있다.) 자세히 보니 검은 봉투는 축축해 보였다. 봉투를 잠깐 내려놨었는지, 할머니 발 앞엔 봉투 크기만 한 작은 물기가 있었고, 그 자국의 주변엔 꽤 굵은 물줄기가 방향을 잃은 채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갔다.


흔한 광경이다. 우리 동네에선 말이다. 오이도 혹은 월곶 마을버스엔 탑승 전에 꼭 읽으라는 메시지가 차 문에 붙어있다. 대략 이런 의미다. <검은 봉투와 함께 탑승하지 마시오.>, <해산물을 들고 타지 마세요.> 처음부터 저 문구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아파트가 늘었고, 도시로 인구가 몰리며, 그만큼 젊은 세대가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몇 차례의 민원으로 시작한 일부 시민의 불편함의 호소로 인해 해산물을 들고 탑승하는 것은 금지되었고, 그 이후로 도시나, 버스에선 비린내를 맡는 경우가 매우 드물거나 아예 없었다. 나는 합리적인 불편이라 여겼고, 응당 치러야 하는 것이라 믿었다. 오랫동안 줄을 선 채로, 버스를 기다리다 검은 봉투를 들고 있단 이유로 승차를 거부당하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당연시했다. 개중에 손주를 주기 위해 양말을 산 할머니가 하필 그것을 검은 봉투에 담아 왔다면 어찌하는가, 하는 일말의 억울함을 헤아릴 필요도 없었다. 우린 알게 모르게, 모르게 알 것들을 알면서도 모르게 지나가지 않는가. 단지 나의 불편을 누군가가 인정해 주길 바라면서.


어쨌든, 봉투를 들고 있던 할머니는 급기야 일어서더니 버스 기사에게 다가갔다. 버스기사는 할머니가 다가오는 것을 모르는지 연신 굽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잘 다녔다.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내가 해석할 수 있는 수준에서 설명하자면 대략 이러했다. 아니 이러할 것이다.


“실례하지만, 저기 기사양반? 이 바닥을 좀 보죠. 내가 이리 했소. 정말 미안해서 내가 몸 둘 바를 모르겠소. 불편하시다면, 지금이라도 내리는 게 낫겠소.”


“여기 내려서 어떻게 집에 가시려고요? 어차피 닦으면 그만인데, 앉아계셔요.”


할머니는 연신 고개를 위아래로 숙이다. 제자리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기사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버스가 종착지에 왔습니다.” (다음 메시지는 어림짐작으로도 때려 맞추기가 어렵다. 다만, 불편하진 않으셨는지요? 는 확실히 들렸다.)


나는 불안과 초조에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다, 그제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역한 비린내가 코와 입속으로 들어왔다. 내가 여기까지 그 고생을 하며 온 이유를 조금 깨달으며, 실컷 비린내를 음미했다.


종착지에 내리자 어르신들은 검은 봉투를 가방에서 꺼내 들고, 급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돌아오는 길에 그 검은 봉투는 그들의 당신을 향한 마음으로 가득할 것이었다. 종착지는 어촌마을이었다. 저 멀리서 일사불란하게 생선을 포대자루에서 쏟아내는 사람들이 보였고, 햇빛에 말린 생선을 걷는 할머니도 보였다. 흔한 어촌의 모습이었다.


나는 천천히 바닷가로 걸었고, 비린내를 맡았으며, 이따금 헛기침을 하며, 가끔은 싱겁게 웃었다. 나는 내가 왜 이런 여행을 즐기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히 모르겠는 건, 내가 잘살고 있었는지를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おげんきです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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