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매일 부대끼면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마치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은 '그냥 내가 말을 말아야지!'라는 마음을 먹게 하고,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만든다. 주로 이때가 사람이 질리는 순간이다. 매사에 정답만 얘기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고 힘들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사람이 있다. '자기주장 제일주의'에 빠진 사람이다. 정말 답이 없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벽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먹먹하기만 하다.
이런 사람의 대표적인 특징은 '답정너'이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너는 대답만 하면 돼!' 이런 생각으로 꽉 찬 사람과는 제대로 된 소통은 고사하고, 오히려 강요만 당하기 쉽다. (본인은 대화와 설득이라고 하지만 상대방이 느끼는 체감은 거의 강요에 가깝다.) 논리도 빈약하고 명분도 허약할 때가 많아서 계속 경청할수록 힘들고 괴롭다.
우리에게는 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저기에서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은 넘쳐나는데, 자기가 가해자라고 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모두 자기가 피해자라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답정너'의 사람이, 좀처럼 나 자신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답정너'의 모습은 기도할 때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기도할 때 우리는 간구하는 입장이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론만 그렇지 막상 기도할 때 보면, 이 관계가 역전되는 현상이 자주 발생한다. '(내가 생각하는) 기도응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하나님은 그냥 대답만 하세요!'라는 식으로 기도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런 자세와 태도를, 유진 피터슨은 다음과 같은 말로 꼬집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의 방법대로 달라고 요청한다.’
이 말을 듣고 정곡이 찔리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나 역시 본심을 들킨 것 같아서, 순간 이 대목에서 멈칫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겉으로는 늘 순종하는 모양새로 기도한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기도의 형식을 빌어서, 하나님께 우리가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강요할 때가더 많다. 주객이 바뀐 것이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깊은 영성의 소유자라고 하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그런데 실제 현장에서는 기도를 많이 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가운데 깊은 영성이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와는 반대로 '한 성격'하는 사람들도 많은 게 사실이다. 성령 충만한 사람 못지않게 혈기 충만한 사람도 많다는 것이다.
이런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는 건, 기도하는 시간을 자기 자아를 강화시키는 시간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이렇듯 '답정너'를 가지고 기도하면,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축소되고 나는 더욱 확대된다.따라서 '답정너'라는 본심을 감추려고 빙빙 돌려서 기도하는 것보다, 차라리 속 보여도 솔직하게 기도하는 편이 더 낫다.
'하나님. 솔직히 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속물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하나님 앞에서 밑장 빼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면, 좀 더 솔직하게 그리고 적나라하게 기도할 수 있다. 적어도 그런 사람은 벽에다 대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조금이나마 말이 통하는 사람일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분 앞에서만큼은 솔직히 까놓고 아뢰자. 그래야 우리 안에서 그분이 확장되는 길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