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찌질해지는 순간》

다시 회복해야 할 능력

by 울림과 떨림

부모만큼 자식이 잘 되는 걸 바라는 사람이 또 있을까? 자식은 부모의 자랑이기 때문에 자식의 잘 남과 잘 됨은 곧 부모의 잘 남요 잘 됨이다. 이런 점에서 자식은 부모의 복사판을 넘어 확장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부모를 제외하고, 우리의 형통을 음을 다해 기뻐해 주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사랑하는 형제들이나 가까운 친구들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원수나 라이벌 그렇다 쳐도, 의외로 가깝고 친한 사람들이 더 마뜩잖은 표정을 짓는 경우도 많.


아무리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잘 먹고 잘 살아도, 내가 그 사람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는 게 우리 인간이다. 앞에서는 내 일처럼 좋아하다가도 뒤돌아서서는 왠지 모를 씁쓸함에 사로잡힌다면,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걸 감안한다면, 진짜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을 구별하는 방법은 의외로 쉽고 간단하다. '나의 잘됨을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주변에도 나에 대해 호평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에서 나의 잘 됨을 폄하하거나 나의 통을 운이 좋아서라고 평가절하한다면, 그런 사람은 그동안 무늬만 친구였던 게 분명하다.


몇 년 전에 방송됐던 <별에서 온 그대>라는 드라마를 보면, 전지현이 이런 대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 심리가 딱 그렇다더라.
나보다 좋아 보이는 곳에 있는 사람을 보면,
아, 나도 거기로 가야겠다가 아니라 너도 내가 있는 구렁텅이로 내려와라, 내려와라 한대.


미안하지만 나는 거기 안 내려가.

니가 사는 그 구렁텅이.
누구를 질투하면서 미워하는 지옥에 빠져 사는 짓.
나는 안 해.


그러니까 나한테 내려와라 내려와라 손짓 같은 거 하지 마.


누군가 잘 나가는 것을 보면 득달같이 달려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와 상관없는 사람인데도 죽기 살기로 악플을 다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의 마음에는 '나도 거기로 가야겠다!'보다는, '너도 내가 있는 구렁텅이로 내려와라!'라는 심보가 자리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사는데 어떻게 너는 그렇게 잘 살 수 있느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참 찌질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세례 요한만큼 저평가를 받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볼수록 매력 있는 참 괜찮은 그리스도인이었다. 그의 됨됨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면, 요한복음 3:29~30을 꼽을 수 있다.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진짜 친구는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나보다 더 잘 되는 모습을 보고도 기뻐할 줄 아는 능력, 나보다 더 잘 나가는 모습을 보고도 응원할 줄 아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와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회복해야 할 능력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진실함은 무엇으로 기뻐하는가를 통해서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사진: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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