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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과 떨림 Dec 02. 2021

《나를 번복할 수 있는 용기》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고

살다 보면 1,2천 원 아니 단돈 몇 백원이 아쉬울 때가 있다. 부모님의 반대와 변변치 않은 않은 형편을  무릅쓰고 들어간 신학대학원에서의 생활이 그랬다. 궁핍하면 생각도 마음도 궁핍해지기 쉽다는 걸 그때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그즈음 해서 우리나라에 한창 커피 열풍이 불고 있었는데, 스타벅스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서 들고 다니면 누구나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었다. 평소 2, 3백원하는 자판기 커피만 알던 나로서는, 카페에서 파는 브랜드 커피가 그렇게 사치스럽게 보일 수 없었다. '저 돈이면 거의 밥 한 끼 값인데...' 커피를 볼 때마다 국밥 한 그릇이 오버랩되면서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비싼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전부 허세와 과시욕에 사로잡힌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사람들 같았다.


그러다 하필 커피를 좋아하는 아내를 만나 연애를 하게 되었다. 그때 아내는 대학교 어학당에서 한국어 강사를 하고 있었는데, 조용한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수업을 준비하는 일이 잦았다. 평소 녹차나 둥굴레차밖에 모르던 나로서는 저세상 풍경으로 다가왔다. 처음 얼마 동안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아내가 낯설게 보이다 못해 마뜩잖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십여 년이 지난 지금은 내가 아내보다 더 커피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게 고양이가 멍멍하고 강아지가 야옹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지난 십여 년 사이에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다른 연인들이 그렇듯, 우리에게도 카페는 교제를 나누기에 더할 나위 없는 최적의 장소였다. 처음에는 커피 한 잔에 과도한 지출을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나 교제를 하면 할수록 카페만큼 가성비 좋은 데이트 장소도 없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커피 두 잔으로 여름의 불볕더위와 겨울의 매서운 바람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은,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커플들에게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더군다나 쾌적한 공간에서 독서와 과제까지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보다 더 좋은 데이트 장소가 없었다. 시나브로 커피 맛을 알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면서 카페를 찾는 사람들이 단순히 커피만 마시러 오는 게 아니라, 커피 한 잔 값으로 분위기와 느낌과 감성을 모두 누리기 위해서 온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돈을 지불하고 말이다.


종종 그때는 맞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지금은 틀렸다고 인정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니건만,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있는 일에 괜히 핏대를 세우고 목소리를 높였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가 다투는 일 가운데 8할 정도는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는 문제'와 관련이 깊은 것 같다. 겉으로는 다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찌질하게 보이기 싫어서 내세우는 대의명분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오래전 비싼 돈을 주고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불편했던 이유도 내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탓이 더 컸을 뿐, 그들의 생각이 틀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누군가 무지한 사람이 확신을 갖는 것처럼 무서운 일도 없다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대세를 따르는 것보다는 소신을 갖고 사는 편이 더 낫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일말의 빈틈도 없이 확신에 차 있을 때 더 무자비하기 쉬운 '어딘가 부족한' 사람들이라는 걸 너무나 쉽게 잊고 사는 것 같다.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틀렸고' 이것만큼 우리의 본모습을 드러내고, 한계를 폭로하는 말이 또 있을까 싶다. 우리가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의 고백도 '나는 틀렸고 주님은 옳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였다는 걸 보면 말이다.


우리는 자신이 틀렸다고 인정하는 사람에게서는 희망을 보지만, 자기만 맞다고 우기는 사람에게는 실망한다. 이런 이유로 생각의 한쪽 문을 열어놓은 사람의 소신이 오히려 더 큰 지지를 이끌어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겠다!' 지금까지는 줏대 없는 사람이 주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린 결론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완전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수정 및 교정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자신을 번복할 수 있는 용기 말이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생각이 강화되는 과정이기보다는 우리의 생각이 탈피를 거듭하는 과정에 더 가깝다. 우리에게는 과연 이런 용기가 있기나 한 것일까?


<사진: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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