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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과 떨림 Nov 30. 2021

《참을 수 없는 엉덩이의 무거움》

신학대학원에 들어갔을 때였다. 입학한 첫해 중 한 학기는 경건 학기로 반드시 기숙사에서 생활해야 했다. 4인 1실로 방을 배정받았는데, 내 위로 두 분은 형이었고 아래로는 동생이었다. 전도사라고는 하지만 다들 남자라서 그랬는지, 일주일에 한 번 방을 청소했다. 한번 청소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어느 날은 청소를 하지 않아, 먼지가 서로 뒤엉켜 이리저리 떼구루루 굴러다닌 적도 많았다.

다른 전도사님들의 눈에는 띄지 않던 먼지들이 내 눈에만 자꾸 띄었다. 마냥 모른 척할 수 없어서, 먼저 빗자루로 방을 쓸고 물걸레로 닦기 시작했다. 한두 번이 점점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처럼 당연시되는 게 점점 짜증났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청소하고 있었지만, 속에서는 ‘이거 너무한 것 아닌가?’ 하는 내적 갈등이 일어났다.

문제의 그날이었다. 월요일 저녁은 주일 사역을 나갔던 전도사님들이 기숙사에 복귀하는 시간이었는데, 그날도 우리 방은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 꾀죄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청소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남들은 다 그냥 지나치는 먼지와 쓰레기가 왜 내 눈에만 띄는 건지.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건강에도 안 좋을 것 같아서 그날도 빗자루를 들고 방을 쓸고 물걸레로 방 구석구석을 닦기 시작했다.

보통 한 사람이 청소를 시작하면 다른 룸메이트들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청소에 동참하는 게 상식이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그런 이상적인 그림을 그렸는데, 다들 자기 할 일로 바쁜 것처럼 보였다. 위의 형들은 그렇다고 쳐도, 적어도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은 “형. 저도 같이 청소할게요!”라고 반응할 줄 알았다.

나중에 후회했다. 기대도 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었을 텐데 하고 말이다. 누구 하나 꿈쩍하지 않고 있었다. 일말의 기대조차 전부 산산이 조각나는 기분이 들었다. 묘한 기분을 억누르며 일부러 동생이 앉아있는 책상 밑을 닦았다. 그러면 동생이 양심상 일어나 청소에 동참할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자리에 앉아서 두 발만 드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걸레를 집어던지면서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네!’라고 일갈하며, 여기에서 목회를 접어야 하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해도 해도 너무하네!’라는 말을 가까스로 삼키고 다시 걸레질을 계속했는데, 그때의 모습이 한동안 잔상으로 남아서 마음을 힘들게 했다. 다음날 새벽기도회에 나가서 기도하는데 나도 모르게 ‘하나님.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목회자가 되겠다는 분들이...’ 하나님께서 나의 하소연에 지지와 응원을 보내 주셨으면 좋았으련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 외로 충격이었다.

“네가 먼저 섬기는 자가 되겠다고 해서, 내가 섬길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조성해 주었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니?”

그제야 기숙사 입소를 앞두고 기도했던 일이 생각났다. ‘하나님. 이번에 경건 학기를 시작하는데, 먼저 섬기는 자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꼭 이런 기도는 200%로 응답해 주신다. 그것도 일사천리로 말이다. 그 일을 겪고 나서, 섣불리 ‘제가 먼저 섬기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섬기는 일처럼 아름답고 고상한 일도 없지만 실제로 섬기는 일은 불편하고 짜증나는 일일 때가 더 많다. 때로는 자존심을 구겨야 하고, 남들이 꺼리는 일도 군말없이 해야 한다. 거기에 간혹 진짜 종인 줄 알고 함부로 막 대하는 사람들까지 감내해야 한다.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한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공부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 대부분 한 자리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서 서너 시간씩 몰입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섬기는 일은 어떨까? 손발로 섬긴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의 지론은 다르다. 엉덩이가 가벼워야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손발은 그다음이다.

우리는 다 예수님의 본을 따라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좀처럼 엉덩이 뗄 생각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세계 열방을 품겠다고, 그분을 위해서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가겠다고 당찬 포부를 밝힌다. 그러나 바로 옆 동료들을 섬기는 일에는 모른 척 눈을 감아 버린다. 우리의 말은 한없이 가볍고, 우리의 엉덩이는 한없이 무겁다. 참을 수 없는 엉덩이의 무거움이다. 엉덩이의 재발견이 시급하다.

<사진: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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