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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과 떨림 Dec 16. 2021

《힘겨운 시절은 책갈피처럼 끼워져 있다》

고난의 두 얼굴, 온유와 강퍅

1.

우리 집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공고지라고 불리는 산동네,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양철집이다. 어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거기에서 우리 형제를 낳으셨는데, 둘째인 나를 낳을 때는 혼자서 낳고 탯줄까지 자르셨다고 한다. 탄생에 얽힌 비화를 듣고 나서 '그동안 어머니가 저한테 해 준 게 뭐가 있어요?'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한여름에 혼자 산통을 겪으시고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주체할 수 없어 찬물에 목욕하셨다. 그로 인해 찬 기운이 몸에 들어가 여태껏 고생하신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반지하 집에서 보냈다.


그래도 그때는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가난하다는 티가 덜 났는데 내게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집안 형편은 얼굴에 고스란히 올라와 스며들게 마련이라는 걸, 그때쯤 본능적으로 알았다. 대학생이 되도록 매일 보통의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있었지만, 마음속에서는 크고 작은 태풍이 생성되었다가 물러가기를 반복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도 몰랐고, 어떻게 사는 것이 맞는지도 몰랐다. 부모님의 인생을 답습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예수님을 만났다.


2.

'목사님은 고생 같은 거 모르고 컸을 것 같아요!'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땐 기분이 묘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말을 들으면 은근히 기분이 좋다. 겉으로 풍기는 이미지가 보세 옷같이 저렴하지 않고 어느 브랜드 옷같이 고급스럽게 보인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살아온 지난날에 비해 얼굴에 그늘이 배지 않은 듯하다. 처음부터 얼굴에 그늘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있었지만 많이 희석되고 걷혔다. 지금까지 살아온 지난날을 함부로 고난의 현장이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사실 고난의 축에 끼지도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욥처럼 입을 틀어막지 않으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고난의 최고봉'에 오른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과 견주면 나의 지난날은 새 발의 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난은 다 상대적이며 내가 당한 고난이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는 건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남자들이 자기가 다녀온 군대가 제일 힘들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동안 내가 경험한 고난으로 다른 사람의 고난을 평가절하하려고 했다. 고난을 훈장처럼 생각해서 우월감을 맛보려고 한 것인데,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우스운 일이 아니었나 싶다. '누가 누가 더 큰 고난을 겪었나?' 하는 시합은 제로섬 게임과 같아서 아무 유익도 없다. 보통 저마다의 힘겨운 시절은 있는 듯 없는 듯 책갈피처럼 끼워져 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볼 땐 별거 아닌 일도 막상 1인칭 시점에서 보면 별일일 때가 많다.  


3.

다윗은 고난 당하는 것이 유익이라고, 그 덕분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었노라고 고백한다. 고난은 확실히 우리를 연단한다. 그렇다고 해서 고난이 누구에게나 다 유익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순진한 생각으로 고난 받은 만큼 더 온유해질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고난 때문에 강퍅해진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이었다. 다윗은 얼마나 많이 고난을 받았는가를 자랑하기보다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으로 자랑했다. 고난은 낭비하지 않은 사람에게만 유익하다.


예수님을 믿은 후로, 20년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허무하게 증발하던 시간은 예수님을 배우고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으로 대체되었다. 그 시간 동안 참 많이도 울었다. 원망하는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볼 때도 많았고, '제게 이러시면 안 되잖아요!'라고 애걸할 때도 많았다. 그에 못지않게 슬픔을 기쁨으로 변환해 주신 은혜와 마음에 넣어주신 평안으로 웃는 날도 많았다. 그때마다 마음에 잔뜩 졌던 주름도 하나씩 펴졌다. 하마터면 우울한 얼굴로 평생을 살 뻔했는데, 그래도 얼굴에서 어두운 그늘이 꽤 많이 걷혔다. 고맙고 감사하다.

<사진: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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