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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과 떨림 Dec 17. 2021

《보통의 날을 살아가는 평범한 그리스도인》

1.
시절이 하 수상하다 보니 영화나 드라마 가릴 것 없이 각종 히어로물의 전성 시대가 열린 듯하다. 사람들은 보통의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들을 히어로물을 통해 대리 만족하며 위안으로 삼는다. 최후의 악당을 제거만 하면 이 세상에 평화가 찾아올 것 같은 느낌은, 현실의 퍽퍽함과 갑갑함을 잠시 잠깐 잊는데 제격이다. 유튜브와 넷플릭스가 놔 주는 모르핀 주사 한 대면 하루의 고단함도 쉽게 잊을 수 있다.

드라마나 영화뿐 아니라 유력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온통 거대 담론과 거창한 명분을 앞세워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경쟁을 벌인다. 거창한 명분을 앞세울수록 현실의 소소하고 보통의 날들은 시시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 명분에 탑승하고 편승하기만 하면 모든 일이 만사형통할 거라는 환상은, 거창한 명분을 앞세운 사람들의 보통의 날들이 얼마나 엉망인지 알게 될 때 눈 녹듯 사라진다. 그래서 일상을 가꾸지 않은 사람의 거대 담론과 거창한 명분은 사기에 가깝다.

2.
'나에게 의지하는 더 약한 존재가 있어서 반복되는 일상을 견딘다.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성실을 유지한다. 불안을 숨기고 어떤 괜찮은 마음을 고르고 또 고른다. 눌려서 활자가 새겨지는 것처럼 살아간다.'

글 쓰는 바리스타 정인한 씨가 쓴 <너를 만나 알게 된 것들>에 나오는 말이다. 거창한 명분과 꿈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사랑하는 그 누군가와 무엇을 위해 오늘도 지루하고 비루한 날들을 견디며 살아간다. 이런 진리 아닌 진리는 보통의 평범한 날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일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음미하는 사람들에게만 포착된다.

코로나 19가 일깨워 준 귀중한 사실이 하나 있다면, 보통의 평범한 날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재조명해 준 것이 아닐까 싶다. 당연하게 여겼던 사람들과 날들이 전혀 당연하지 않은 소중한 그 무엇이었음을 말이다.

3.
목회 초년병 시절까지만 해도, 설교나 상담할 때 경건한 신앙 용어를 구사해야 신령한 목회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신령함이 아닌 현실 감각이 떨어진 데서 비롯된 현상이었다. 현실 감각이 떨어진 사람일수록 신앙적인 특수 용어나 추상적인 거대 담론 뒤에 숨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매일 균형을 잡고 사는 사람이다. 어느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 때 신앙은 일그러지고 왜곡된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는 믿음은 좋았으나 그것이 지나쳐 보통의 평범한 일상을 소홀하게 대했다. 일상이 엉망이 되자 그들의 좋았던 믿음도 뒤틀렸다.

나 같은 목회자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 하나 있다. 내가 얼마나 뛰어나며 유식한 설교자인지 은근히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경건한 용어나 어휘를 동원한다는 것이다. 마음에 와닿지 않은 표현일수록 휘발성이 강해서 쉽게 잊힌다. 실제 삶에 미치는 영향도 미미하고 영양가도 떨어진다. 그래서 나만의 세계와 만족에 빠지지 않기 위해 가급적이면 일상의 언어로 설교문을 작성하고자 씨름한다. 이는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여서, 어떻게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이어진다.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를 표현하실 때,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것들로 비유하셨다. 들을 귀 있는 자라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일상의 언어로, 자칫 추상적일 수 있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셨다. 고로 오늘의 보통의 언어로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 전하고 설명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럴싸한 미사여구를 줄이거나 빼는 일은 매번 어려운 작업이다. 지나친 경건주의에 빠지려 할 때마다, 좀 있어 보이고 싶을 때마다 보통의 날을 살아가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걸 되새겨본다.

<사진: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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