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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과 떨림 Jan 14. 2022

《이대로 살 자신이 없었다》

1.
아직도 그날의 새벽을 잊을 수 없다. 사람마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있다고 하던데, 내게는 그날이 그런 순간이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홀로 사무실에 앉아있다가 나도 모르게 외마디 탄식이 터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한동안 고개를 떨구고 뭉크의 절규처럼 머리를 움켜쥔 채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긴 한숨을 내 쉰 후에 결심했다. 오늘부터 꾸준히 글 쓰는 연습을 하겠노라고 말이다. 목사 안수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오래전부터 말씀 묵상을 해 왔던 터라 개인적으로 말씀을 연구하고 곱씹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많은 은혜를 누렸고, 이 은혜를 설교로 승화시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야무진 꿈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깨닫고 발견한 은혜를 설교 원고로 옮기는 과정에서 최대 50% 이상 증발해 버렸기 때문이다. 공대 출신인데다 신학교에서도 설교학만 배웠지, 글을 어떻게 쓰고 전개해 나가야 하는지는 배운 적이 없었다. 이론과 과제로서 설교문을 작성하는 것만 배웠을 뿐이었다.

앞으로 한국교회 목회자로 살아가려면 물밀듯이 밀려오는 설교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매번 설교 원고를 쓰는 일로 끙끙 앓을 순 없었다. 평생을 그렇게 전전긍긍하면서 살 자신이 없었다. 탄식과 절규가 교차할 때, 유레카처럼 '이대로는 안 되겠다!'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2.
처음에는 글을 쓰면 어느 정도 쓸 줄 알았다. 생각이 그대로 지면으로 옮겨지는 줄 알았다. 의욕은 좋았지만, 글이 술술 써지는 건 고사하고 매번 글감과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애를 먹었다. 동원하고 활용할 수 있는 어휘력의 빈곤도 심각했다. 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라고 했는지 그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귀에 메아리치는 소리가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예전의 답 없는 삶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만약 나에게도 남들처럼 특출난 무언가가 있었다면 빨리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에게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특별한 무언가가 없었다. 있는 거라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오기와 끈기와 노력뿐이었다.

낮에는 사역으로, 밤에는 육아로 심신이 말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새벽이면 골방(새벽기도 후의 사무실 책상)에서 말씀 묵상과 독서를 병행하며 글을 썼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홀로 남아 밤이 새도록 천사와 씨름했던 것처럼, 내게도 글을 쓰는 일은 전쟁 같은 일이었다. 여기에서 글을 쓰는 것마저 놓치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절박했다. 주변에 누구도 이렇게까지 글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조언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다들 사역하기에도 바쁘고 벅찬데, 왜 쓸데없이 글까지 쓰느냐 하는 눈치였다. 그럴 때면 매일 광야를 혼자 걷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새벽기도 후의 사무실 책상이 골방이 된 이유는 간단하다. 좁은 집에서 세 아들을 키워야 했기에, 나만의 공간이나 시간은 상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밤낮으로 전임 사역을 하면서 세 아들을 키우는 일은 늘 한계에 도전하는 일같이 버겁게 느껴졌다. 사역도 육아도 글쓰기도 내게는 전부 전투에 가까운 일이었다.

3.
하루는 다윗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물맷돌을 묵상하다가 큰 위로와 격려를 얻었다. 다윗도 양이나 칠 정도로 별 볼 일 없는 인생이었다. 차기 왕을 선택할 때 사무엘 앞에 부름을 받지 못할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소년이었다. 양치기 다윗이 물맷돌을 던지는 걸 보면서 누구도 칭찬하지 않았다. 그걸 실력이나 능력으로 봐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다윗은 주어진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했다. 자기에게 없는 것 때문에 불평하기보다 자기에게 있는 걸 가지고 갈고 닦았다. 그는 꿈에도 몰랐다. 그 물맷돌이 훗날 골리앗을 쓰러뜨릴 필살기가 될 줄은 말이다.

다윗에게 물맷돌이 있었다면, 내게는 글쓰기가 물맷돌이나 마찬가지다. 보잘것없는 돌도 잘 갈고 닦으면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필살기가 될 수 있는 걸 보면서, 고독한 글쓰기 작업을 꾸역꾸역해 나갔다. 처음에는 그저 목회자로서 부족한 점 때문에 글쓰기를 시작했지만, 그동안 글만 갈고 닦아진 게 아니란 걸 알았다. 글을 쓰는 지난한 과정에서 나의 모난 성격과 생각이 많이 연마되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나마 연마된 정도가 이 정도니까) 내면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덤이었다. 어느새 글 쓰는 일이 하나의 습관이 되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었다. 글을 쓰면서 하나님께 좀 더 요긴하고 유용하게 쓰임 받았으면 좋겠다. 또한 글을 갈고 닦는 과정에서 주님의 형상으로 더욱 갈고 닦아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사진: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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