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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과 떨림 Feb 07. 2022

《시간이 없어 새벽과 밤에 글을 쓴다》

어둠을 틈 타 글 쓰는 목사

1.
새벽기도는 한국교회 목회자라면 운명이자 숙명과도 같은 일이다. 새벽기도에 말씀을 전한다고 했을 때, 전날 밤에 두 다리 쭉 뻗고 단잠에 빠져들 목회자는 그리 많지 않을 듯싶다. 행여나 내일 새벽에 알람을 듣지 못한 체 그냥 자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일말의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목회자에게 끔찍한 악몽은 꿈속에서 귀신을 만나는 것도 아니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설교를 펑크 내는 것만큼 목회자에게 끔찍한 악몽도 없다.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신대원을 졸업하고 전임 사역을 시작한 지 십 년이 좀 넘었다. 지금까지 새벽기도를 2번 펑크 냈던 것 같다. 피곤에 푹 절은 전도사 시절에 한 번(일 년에 364일 새벽기도하는 교회였다!), 그리고 목사 안수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한 번으로 기억하고 있다. 알람을 그토록 많이 맞춰 놓았건만 '딱 1분만 더'라는 생각 앞에서는 속수무책인 건, 목회자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새벽에 '딱 1분만 더'는 1시간과 맞먹는다고 보면 틀림없다. 지금까지 새벽기도를 평크내고 맞이하는 아침만큼 '쓴 하루'도 없었다.

2.
요즘 공중파와 케이블을 막론하고 다양한 콘셉트의 오디션 프로그램이 인기다. 만약 전국의 목회자를 대상으로 새벽기도와 관련된 에피소드 대회나 오디션을 연다면 어떨까? 할리우드 영화 뺨 칠 정도의 웃픈 이야기가 쏟아질 거라고 확신한다. 새벽기도 시작 10분 전에 일어나서 하의 실종인 상태로 교회에 왔다거나,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나왔다거나, 머리가 산발인 상태로 말씀을 전했다거나, 성경과 설교 원고 없이 맨 몸으로 강대상에 올랐다는 둥의 에피소드는 끝이 없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당사자에게 그 순간은 편집해서 삭제해 버리고 싶은 민망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3.
목회자 중에도 새벽형 인간이 있고 올빼미형 인간이 있다. 나의 경우는 본래 올빼미형으로 늦은 밤에 몰입하는 스타일이었지만, 목회자가 된 이후로 강제로 새벽형 인간이 되었다. 둘째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새벽기도가 끝나면 집에 들어가서 잠시 눈을 붙이고 나왔다. 1시간 남짓한 아침잠은 새우깡처럼 자도 자도 물리지 않을 정도로 꿀맛이었다. 그런데 셋째가 태어나면서부터 새벽기도 후에 아침잠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다. 차마 밤새 셋째와 씨름하는 아내에게 독박 육아와 살림을 전부 떠넘길 수는 없었다. 아내와 함께 아이들을 깨우고 씻겨서 아침밥을 먹이고, 제시간에 어린이집에 보내려면 꿀송이보다 더 단 아침잠을 내려놓아야 했다. 좁은 집에서 세 아들을 보느라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다보면, 체력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어린 아이 셋씩이나 있는 집에서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영적으로 제대로 채움 받는 시간도 부족해서 가뜩이나 곤고한 육신에 영혼도 메마를 때가 많았다.  

4.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새벽기도 후에 집에 들어가기까지 대략 1시간 남짓한 시간을 활용하기로 했다. 채움 받지 못한 영혼이 다 닳기 전에, 나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그 시간에 개인 경건을 비롯해서 독서와 글쓰기를 시작했다. 새벽에 1시간은 한낮의 2~3시간과 맞먹을 정도로 질적인 시간이자 농도 깊은 시간이었다. 아침잠을 포기한 첫 해는 낮에 잠이 쏟아졌다. 눈도 침침하고 몸도 덜 풀린 듯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한 적도 많았다. 그러나 점점 습관이라는 면역력이 형성되자 피곤도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전에는 속 빈 강정 같았는데, 아침 시간을 오로지 나를 위해서 사용하면서 속살이 차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삶이 좀 더 질적으로 변하면서 나와 일상에 대한 만족과 성취감도 동반 상승했다.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 속에서 자존감도 많이 회복됐는데, 그렇게 보낸 시간이 하루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꽤 지났다. 지금은 하루 종일 세 아들을 보느라 진이 다 빠진 아내를 구원하기 위해, 새벽에 미리 설교와 사역을 준비한다. 최대한 야근하지 않으려는 나의 몸부림이자 아내와 아이들을 위한 작은 선물이다. 아내와 세 아들이 알랑가 모르겠다. '하나님은 아시지요?'

<사진: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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