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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과 떨림 Feb 26. 2022

《재기력, 다시 일어나는 힘》

어느 분야에서 전설로 불린다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전설하면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은 불사조 느낌을 주는 것 같다. 그들에게는 살아서는 감동을 주고 죽어서는 울림을 주는 묘한 매력이 있다. 복싱에 조예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복싱계에서 전설로 통하는 서너 명 정도는 알고 있다. '홍수환, 장정구, 유명우' 홍수환, 장정구 선수의 실황 경기를 TV로 직접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유명우 선수의 경기는 한 번씩 보면서 응원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기억하는 유명우 선수는 권투 선수답지 않은 곱상한 얼굴과 뽀얀 피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매 경기마다 폭풍 펀치로 상대를 몰아붙일 때면, 그렇게 통쾌하고 짜릿할 수가 없었다.

안타깝게도 전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흔해 빠지면 더는 전설이 아니리라) 그에 반해 '그 외 기타 등등'의 선수들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다. 누군가의 이름이 낯설게 다가올 때가 있다. 그건 유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피터 버클리'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굉장히 생소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가 권투 선수였다는 사실도 몰랐다. 무하마드 알리나 마이크 타이슨, 메이웨더나 파퀴아오는 들어봤어도 '피터 버클리'는 당최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한 번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적이 없는 무명의 권투 선수였다. 권투에서 조금이나마 두각을 나타냈으면 모를까, 그는 승리와는 담을 쌓고 살았던 그저 그런 선수에 불과했다.

그가 어떤 선수였는지 알게 되었을 때, 세상이 그에게 무관심했던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19년 동안 299번 싸웠다. 그중에서 31번은 이겼고 256번은 졌다. 그리고 나머지 12번은 무승부였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진' 권투 선수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의 전적을 봤을 때 '무슨 이런 선수가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시해도 너무 시시했다. (세상은 시시하면 그냥 무시한다)

그런데 그의 전적을 다시보기하면서 생각을 새로고침하게 되었다. 그는 무려 20년 가까이 복싱 선수로 활동했다. 그리고 누구도 하지 못한 299번의 시합을 했다. 20년 동안 거의 300번에 가까운 시합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승리를 거둔 경기는 기껏해야 31번 밖에 없었다. 12번의 무승부를 뺀 나머지 256번이 전부 패배였다. 세상의 '승자승 원칙'에 따르면, 그가 기록한 256번의 패배는 명백한 불명예 기록이다. 그런데 정말 불명예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복싱 선수 중에 무패의 전적으로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는 '탈인간급 어나더 레벨'의 선수가 있다. 그런 선수에게도 패배하는 날은 오게 마련이다. 무패 가도를 달리다가 첫 패배를 당한 선수들의 이후 행보를 보면 눈여겨볼 만하다. 다시 일어나지 못해서 은퇴하거나 내리막길을 걷는 선수들이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지는 것을 밥 먹듯 하는 선수들에게 또 한 번의 패배는 충격적이지 않다. 하지만 여태껏 승리만 맛본 선수들에게 단 한 번의 패배는 강철 멘탈에 금을 낼 정도로 충격적이다. 패배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사람일수록, 패배는 더 쓰리고 고통스러운 법이다. '피터 버클리'는 수없이 졌다. 그럼에도 256번 패배한 만큼 256번 다시 일어났다. 이것은 권투를 사랑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미친 짓이다.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하는 사람이 감탄을 자아낸다면, 계속해서 다시 일어나는 사람은 감동을 선사한다. 비록 피터 버클리는 감탄을 자아내는 전설은 아니었지만, 감동을 주는 평범하나 비범한 선수였다.

사람들은 승리하는 일에 익숙하라고 그것이 강자의 조건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버클리는 승리하는 것보다 패배하는 일에 더 익숙했다. 나는 이것을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그는 쓰러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에 더 익숙했다고 말이다. 그는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많이 진 선수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많이 경기한 권투 선수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기려고 권투를 하는 게 아닌 권투가 좋아서 경기한 흔치 않은 선수였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절대 넘어지거나 쓰러지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의 전설들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던 비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다시 일어났던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더러는 넘어졌고 더러는 무너졌다. 그럼에도 끝끝내 기권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이걸 보면, 믿음은 기권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싸우는 것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

'나의 세계는 꽝 소리를 내며 무너졌지만, 세계의 재건은 무너진 자리에서 이루어지리라.'

홍인혜 작가가 쓴 '고르고 고른 말'을 읽다가 주운 문장이다. 무너진 곳에서 재건이 이루어진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재기도 믿음이 무너진 곳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려면 무너졌던 곳에서 다시 두 주먹 불끈 쥐고 일어나는 일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승리는 이미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약속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은 이미 약속된 승리를 믿고 다시 일어나 경주에 임하는 것에 있다. 우리가 할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나는 믿음은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힘 곧 재기력이라고 생각한다. 무너졌다면, 쓰러졌다면 딱 그만큼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면 된다. 다시 일어나야 믿음이다.

<사진: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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