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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과 떨림 Mar 29. 2022

위로에 헤픈 진짜 이유

나는 칭찬에 참 인색한 집에서 자랐다. 칭찬을 받아본 기억이 없었던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인 것 같다. 하나는 부모님께서 칭찬하는데 익숙하지 않으셨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내게는 칭찬을 받을만한 뛰어난 무엇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칭찬을 받는 것도 어색했고, 칭찬을 하는 것도 서툴렀다. ‘사람들은 칭찬에 인색하면서 위로에는 더할 나위 없이 헤프다. 마치 안 되기를 바랐던 것처럼’ 신준모 씨가 ‘다시’라는 책에서 한 말이다. 이 말을 곱씹으면서 칭찬에 나만 인색한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좀 잘 나간다 싶으면 끝까지 침묵 모드를 유지한다. 그러나 막상 어려움을 겪으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위로 모드로 바뀐다. 다른 사람의 행복이 곧 나의 불행이요, 다른 사람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것도 고운 눈으로 바라보기보다 살짝 비틀어 삐딱하게 바라본다.

야구에서 ‘타격 능력, 장타력, 주력, 수비력, 송구 능력’을 갖춘 선수를 가리켜 ‘5툴 플레이어’라고 부른다. ‘5툴 플레이어’는 모든 야구 선수가 꿈꾸는 선망의 대상이다. 이런 맥락에서 욥도 ‘5툴 신앙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난이 까닭 없이 들이닥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는 ‘신앙, 가정, 건강, 재물, 성품’에 있어서 어느 하나 빠진 데가 없었다. 신앙도 훌륭했고 가정도 평안했고 건강했다. 거기에 자식들도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엄청난 가축을 거느릴 정도로 부자였다. 만약 욥이 고난을 당하지 않았다면 요셉을 제치고 결혼 배우자감 1위에 올라섰을지도 모른다. 그런 욥이 하루아침에 불상사를 당한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세 친구들이 나타나 위로한다. 이들은 칭찬에는 더할 나위 없이 인색하면서 위로에는 더할 나위 없이 헤픈 모습을 보여준다. 헤픈 정도가 아니라 도가 지나쳐 정죄할 정도로 말이다.

우리는 무슨 심보이기에 잘 나갈 때 좀 더 칭찬하지 못하는 것일까? 칭찬하면 왠지 내가 더 못났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잘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 될 때의 얘기다. 핏줄을 나눈 형제나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가 성공 가도를 달리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칭찬을 하는 게 좀처럼 쉽지 않다. 솔직히 입으로는 칭찬해도 마음까지는 잘 실리지 않는다.

우리는 나 자신을 칭찬하는 데도 서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를 정죄하는 데는 능숙하지만 칭찬하는 데는 미숙하다. 그리스도인하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인식이 뿌리 깊이 박혀있어서 그런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암묵적으로 ‘칭찬하면 교만해져서 못 쓴다, 칭찬은 하나님께만 돌리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게다가 이 땅에서 칭찬하면 천국에서 받을 상이 없다고까지 하면서 입단속을 시킨다. 칭찬과 박수가 장차 받을 상과 관련돼 있다면 비난과 정죄는 심판과 관련돼 있다. 차라리 제대로 칭찬하고 박수를 보내는 편이 더 낫다. 그것이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보다 백배 천배는 더 낫다.

때로는 나 자신의 수고를 하나님께 꺼내 놓고 ‘하나님. 저 잘했죠?’라고 말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느헤미야도 자신의 수고와 헌신을 다른 사람은 몰라줘도 하나님만은 기억해달라고 기도했다. ‘내 하나님이여 이 일로 말미암아 나를 기억하옵소서(느13:14)’ 사람들 앞에서 칭찬받으려고 하는 게 문제지,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으려고 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해 주시는 칭찬은 지치지 않고 선한 일을 계속하게 하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칭찬하거나 나를 칭찬하는 일에도 인색하지만, 다른 사람이 칭찬받는 것조차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한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칭찬받으면 괜히 마음이 불편하다. 그래서 못마땅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교회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교회 안에서 누군가가 칭찬받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고 천국에서 받을 상을 까먹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명분일 뿐, 시기와 질투로 공공의 적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를 칭찬하고 싶으면 더 큰 지혜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애먼 사람만 힘들게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지혜가 빠진 공개 칭찬은 누군가에게는 공개처형이 될 수 있다.

잠언을 보면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한다는 이상한 말씀이 나온다. 메시지 성경에서는 ‘칭찬해 보아야 사람됨을 안다.’라고 번역했다. 칭찬은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한다. 칭찬을 받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가 곧 그 사람의 어떠함을 보여준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칭찬을 받을 때에도 그대로 적용이 가능하다. 다른 사람이 칭찬받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가 곧 나의 수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는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잘 되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이 공존한다. 나보다 더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볼 때면, 이 양가감정이 치고받고 싸운다. 다른 사람의 행복한 모습에 속이 불편하다면 이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을 칭찬한다고 해서 내가 더 바보가 되는 건 아니다. 더군다나 그가 받을 상을 천국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또한 남의 행복이 나의 불행을 부추기는 것도 아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칭찬을 남발하는 게 문제지, 그의 성실과 수고와 땀 흘림을 칭찬하는 건 적극적으로 장려할 일이다. 나만 잘 되기를 바라고 나만 칭찬받으려는 마음이 나를 병들게 하고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사진: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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