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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과 떨림 Apr 18. 2022

《삼켜버리지 않도록》

하나님의 열심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뜨거운 열심으로 이어지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뜨거운 열심이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에서 비롯되었다고 감히 얘기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나는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식을 줄 모르는 열정으로 주님의 일에 열심인 분들이 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열정과 에너지를 뿜어내곤 하는데, 그럴 때면 마음속 깊은 곳까지 감동이 밀려온다. 성령 충만한 모습이 어쩌면 저런 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더군다나 풍성하게 맺힌 열매는 주님께서 그와 함께하신다는 확실한 사인과도 같다.

그런데 주님을 위해 ‘한 열심’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가운데 의외로 냉정하고 매정한 이들이 적지 않다. 주님의 일에는 누구보다 뜨거우면서도 정작 사람들을 향해서는 한없이 차갑다고나 할까? 한 마디로 사역에는 열기가 넘치지만, 사람을 향해서는 냉기가 가득하다. 때로는 주님을 향한 열기가 개인의 혈기는 아니었는지 분간이 안 될 때도 있다. 분명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주님을 위해서 사역할 때, 주님은 온데간데없고 일밖에 보이지 않았던 적이 많았다. ‘주님을 위해서’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나를 위해서, 인정받기 위해서’일 때가 더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일에 삼켜버렸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첫째 아들도 일에 삼켜버린 채 살았던 사람이었다. 첫째 아들은 동생이 속을 썩일 때, 지칠 줄 모르는 강철 체력으로 아버지를 위해 수고했다. 아니 충성했다. 아들이라기보다는 흡사 종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만큼 첫째 아들은 일을 통해 아버지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어 했다. 그러는 중에 아버지보다 아버지를 위한 일을 더 사랑하게 되었으리라. 일에 삼켜 버린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일을 좋아하는 남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마르다에게서도 그와 같은 문제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본래 마르다의 집은 주님께서 사랑하실 정도로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그래서 마르다가 주님을 위한 저녁 식사 준비에 더욱 공을 들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마르다가 동생 마리아에 비해 주님을 덜 사랑했으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마르다의 마음이 주님을 위한 일을 하다가 거기에 삼켜 버린 것이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이런 역전 현상은 대개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시나브로 진행된다. 그녀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말이다.

일이 눈에 가득하면, 사람은 눈 밖으로 밀려난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일에 삼켜버리면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에 눈이 멀면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 말이다. 열매(성과)가 먼저인 사람에게 사람은 그저 수단과 방법일 뿐이다. 그래서 사탄은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방해하지 못한다 싶으면, 그분을 위한 일과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일에 미치게 만들어 탕자의 형처럼 시나브로 냉혈한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만큼 안타깝고 비극적인 일이 또 있을까? 거리상으로는 아버지 곁에 바짝 붙어 있지만, 마음으로는 아버지의 사랑에서 떨어져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면서 참 많이도 삼켜버린다. 특별히 간증에 삼켜 버린 분들이 적지 않다. 가는 곳마다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간증으로 유명한 분들이 있다. 그러면 삽시간에 전국구 스타?로 급부상하여 여기저기에서 섭외 요청이 쇄도한다. 그런 분 가운데는 사례비에 개의치 않고 불러주시는 곳이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을 흔쾌히 소개하겠다고 하는 분들이 많다. 지방임에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겠습니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분을 보면, 속으로 ‘이분은 진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종종 ‘몇 명이나 모이는지, 얼마나 사례를 하는지’ 노골적으로 밝히는 분들이 있다. ‘저는 몇 명 이하로는 안 갑니다. 저는 얼마 이하로는 안 갑니다!’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간증으로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세상에서처럼 유명세에 따라 몸값을 올리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 간증을 하다 간증에 삼켜 버린 것은 아닐는지.

어디 간증뿐일까? 사역에 삼켜버리고, 목회에 삼켜버리고, 열매에 삼켜버리고, 프로그램에 삼켜버리고, 봉사에 삼켜버리고. 눈에 띄는 성과를 내고 열매까지 풍성하면, 더 쉽고 빠르게 삼켜버린다. 자기 증명이라는 욕구가 우상이 되는 건 한순간이다. 그래서 주님보다 그분의 일을 더 사랑하면, 뛰어난 성과와 풍성한 열매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먹혀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작은 녹이 결국에는 쇠를 전부 삼켜버린다고 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조금’을 방치한 결과다. 옛날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큰소리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외치게 했다. ‘너도 반드시 죽는다는 걸 기억하라!’는 뜻으로, 승리에 삼켜버리지 않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견제 장치였다. 여기에서 예외인 사람은 없기에, 나의 열심에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신다는 걸 늘 되새김질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신다!’는 고백이 ‘나의 열심’에 삼켜버리지 않도록 막아주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사진: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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