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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과 떨림 Aug 01. 2022

실력은 요만큼인데 인정은 이만큼 받고 싶을 때

표절의 유혹

바리새인의 경건 생활은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손색이 없었다. 토색, 불의, 간음은 하지 않았고 일주일에 두 번의 금식과 소득의 십일조까지. 그들보다 더 나은 신앙은 어디에도 없는 듯 보였다. 그런데 그때 당시 대다수의 사람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금식을 일주일에 두 번은 고사하고 한 번 하는 것도 힘든 형편이었다. 육체 노동하는 사람이 금식을 어떻게 하나? 건설 현장 일용직 노동자는 새벽부터 현장에 나가야 한다. 새벽기도는 참석할 수 없다. 그래서 새벽기도에 참석 여부만 놓고 믿음의 유무나 정도를 가늠하려는 시도는 조심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이 정기적으로 경건 생활을 무리 없이 할 수 있던 건 그나마 안정된 생활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형편이 된다고 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겉으로 봤을 때, 그들의 경건은 대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속에는 알맹이보다 거품이 더 많았다. 그들은, 경건이 요만큼이었지만 사람들에게는 이만큼 보이고 싶었다. 이때 찾아오는 유혹이 외식이다. 유혹은, 실력은 요만큼인데 인정은 이만큼 받고 싶을 때 찾아온다. 더 강렬하게.

요즘 표절 문제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문제가 되고 있다. 얼마 전 평소 대중에게 사랑받던 작곡가 겸 가수도 오랫동안 표절한 것이 들통나 시끄러운 적이 있었다. 인성과 개념까지 갖춘 천재 작곡자로 불렸기 때문에, 대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것처럼 분노했다. 그의 표절은 어쩌다 한두 번 정도가 아닌 매우 익숙하고도 습관적인 것 같았다. 왜 그랬을까? 실력은 요만큼인데 인정은 이만큼 받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이런 문제는 나 같은 목회자도 예외는 아니다. 목회자의 사역은 말씀과 기도가 3, 심방을 비롯한 행정과 기타 등등의 잡무가 7 정도의 비율로 이뤄진다. 여기에 예고 없이 나는 장례까지 감안하면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는 물리적인 시간은 더 줄어든다. 그런데 성도들이 목회자를 목회자로 인정하는 건 그 반대다. 무슨 말이냐면, 설교(말씀과 기도 포함)를 7로 그외 다른 사역을 3정도의 비율로 목회자를 평가하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인정받는다는 표현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성도들도 속으로는 존경하는 목회자가 있다. 신뢰가 더 간다는 점에서 인정이라는 의미를 이해하기를)

가뜩이나 설교를 준비하는 시간도 부족한데, 설교를 작성하는 실력까지 부족하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수밖에 없다. 이때 강렬하게 찾아오는 것이 표절이라는 유혹이다. 성도들은 목회자가 주중에 얼마나 많은 사역으로 바쁘게 보냈느냐에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얼마나 설교를 잘 준비해서 전하는지에만 관심이 많다. 주중에 바빴다는 걸 감안해서 미흡하게 준비된 설교를 너그럽게 들어주는 성도는 없다! 냉정하게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설교면 설교, 심방이면 심방, 교육이면 교육, 찬양이면 찬양, 운전이면 운전. 성도들은 목회자라면 빠짐없이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다른 사역을 신실하게 잘해도, 설교가 부실하면 목회자로서 인정받기 어렵다. 담임목사 청빙을 좌우하는 것도 설교이지 않던가!

사람에게는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목회자도 실력은 요만큼인데 인정은 이만큼 받고 싶은 건 마찬가지다. 다만 지나치지 않도록 재갈을 물리며,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하고 있을 뿐이다. 이 욕구를 부인하지 않으면 표절에 넘어가는 건 한순간이다. 그러면 표절이 습관이 되는 길을 밟게 된다. 손쉬운 해결책은 언제나 달콤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주어진 시간과 여건 속에서 틈틈이 그리고 미리 설교를 준비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죽을 쒔다면 잘해도 나, 못해도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잘했든 못했든 내가 나를 인정할 수 있어야, 성도들의 인정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표절의 유혹을 뿌리치려면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요행을 바라지 않고, 지금부터라도 땀 흘려 말씀을 준비하는 수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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