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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과 떨림 Sep 12. 2022

하마터면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낼 뻔했다.

세 아들이 초등학생이라 그런지, 손이 가는 게 한둘이 아니다. 아내가 전날 미리 아이들 등교를 준비해 놓지만, 그래도 아침만 되면 챙겨줘야 할 것이 산더미다. 누누이 말해도 귓등으로 흘려듣고 준비물을 빼먹고 가는 아이들을 보면, 아직 어리니까 싶으면서도 잔소리를 더 하게 된다. 아이들은 뻔한 말, 당연한 말을 반복할 때 잔소리라고 생각하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아무래도 부모에게는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하면 아이들을 좀 더 바른길로 안내하고, 이래라저래라 참견을 많이 하면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될 거라는 환상이 있는 것 같다. 나무도 사람의 손을 많이 타면 홀로 굳게 설 수 없듯이, 사람도 간섭을 많이 하면 홀로 올곧게 설 수 없다. 시시콜콜, 크고 작은 일에 배 놔라 감 놔라 하는 태도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오히려 스스로 서지 못하도록 방해만 할 뿐이다. 이 과정에서 관계도 뒤틀리고 꼬인다. 생선을 구울 때 자주 뒤집으면, 정작 나중엔 먹을 살이 없다. 마찬가지로 매번 지적하면서 들들 볶으면 멀쩡한 사람도 남아나지 않는다.

지적을 많이 한다고 해서 효과가 좋은 건 아니다. 오히려 안 하느니만 못할 때가 더 많다. 그렇다고 똑같은 잘못이나 실수를 반복하는데 침묵으로 마냥 두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때는 들을 귀가 있는지를 잘 분별해서 조언해 주는 편이 낫다. 내가 생각하는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누군가 잘못을 지적해 주기 전에 자신의 문제를 알고 수정하려는 사람이다. 설령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는 것 같아 말해줘도, 기분은 나쁘더라도 고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잘못하거나 실수한 곳에 빨간색으로 표시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들을 귀가 없는 사람은 당최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른다. 콕 집어 말해줘도 왜 그게 문제인지 모른다. 문제의식이 없으니 똑같은 문제를 계속 되풀이한다. 그러면 주변에서 손을 떼게 되어 더 고립되는 악순환에 빠진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들을 귀도 이와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한다.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려 자신의 문제와 맞닥뜨린다면, 그래서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반응을 보인다면, 그 사람이 바로 들을 귀 있는 사람이다.

주변에 나를 책망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정말 잘해서거나 아니면 기회를 주면서 그냥 넘어가 주거나 그것도 아니면 포기했거나. 요즘은 너도나도 다 잘난 시대다. 그래서 뭔가 말을 해 주어도 꼰대처럼 바라보거나, '너나 잘하세요!'라는 눈빛으로 쳐다보기 일쑤다. 나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닌 것 같다. 그대로 시인하기보단 어쩔 수 없었다는 반응부터 하고 보니 말이다. 물론 사사건건 트집 잡는 사람도 있고, 자기 할 일도 제대로 못 하면서 간섭하는 프로 참견러도 있다.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누군가 내 문제를 콕 집어줄 땐 정말 그러한가 하여 돌아보려고 하는 편이다. 인정하긴 싫지만, 사실 열에 여덟아홉은 그들의 말이 맞거나 새겨들으면 좋은 말이었다. 귀를 열고 듣기 시작하자, 꿀조언을 아낌없이 방출해 주려는 분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났다. 하마터면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낼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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