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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과 떨림 Dec 03. 2022

삐뚤어질 거라고?

‘나도 별수 없는 인간’일 수 있다는 생각

우리는 숨을 쉬듯 누군가를 손가락질하지만 당신과 나 역시 한 발만 잘못 디뎠어도 다른 삶을 살게 됐을 것이다. 당신과 나는 우리가 살았을 삶을 대신 살고 있는 자들을 비웃으며 살고 있다. ‘나도 별수 없다’는 깨달음. 인간을 추락시키는 절망도, 인간을 구원하는 희망도 그 부근에 있다.

언론인 권석천 씨가 쓴 ‘사람에 대한 예의’에 나오는 말인데, 이 대목을 읽다가 한편으로는 뜨끔했고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지나온 날들을 돌아볼 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발'만 잘못 내디뎠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아찔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한순간 욱해서 다른 선택을 했다면, 기분 내키는 대로 일단 저지르고 봤다면,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딴마음을 품었다면... 지금쯤 나는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을까? 과연 지금의 아내를 만나 가족을 이루고, 목회자가 되고, 세 아이의 아빠로 살 수 있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어쩌면 내가 그토록 손가락질하던 사람들과 별반 다름없는 사람으로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땐, 개혁적인 마인드로 충만했다. ‘나는 저런 사람들과 달라!’ 이런 생각으로, 나는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나’와 ‘저’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간발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걸, 매일 시시각각 깨닫고 있다. 한순간 잘못 내디딘 ‘한 발’ 때문에 화려하게 빛나던 스타가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얘기, 그토록 신사적이었던 사람이 지탄받는 사람이 되었다는 얘기, 비난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비난받는 사람이 되었다는 얘기... ‘남’의 일이라 생각했던 일이 ‘나’의 일이 되는 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다.

흑화(黑化)라는 말이 있다. 평범했던 사람이 ‘어떤 사건’을 겪으면서, 비정하고 잔인하게 변했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학창 시절 마음이 따뜻했던 친구가 수년이 흘러 직장에서 갑질과 폭언을 일삼는 상사가 된 것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마음 아파하던 사람이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하는 사람이 된 것도, 순수했던 신학생이 기업가 정신으로 투철한 목회자가 된 것도, 모두 흑화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흑화되었다는 말은, 뒤집어 보면 처음에는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걸 의미한다. 다만, 그 ‘어떤 사건’을 계기로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시커멓게 변했을 뿐이다. 이것을 우리는 ‘변질’ 혹은 ‘타락’으로 부른다. ‘어떤 사건’이란, 가령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기껏 도움을 주었는데 뒤통수를 맞았다거나, 불법이나 편법을 쓴 사람 때문에 피해를 봤다거나, 밤낮으로 땀 흘려 수고했는데 누군가 공을 가로챘다거나.’ 기껏 선을 행했는데 악으로 돌려받거나 그에 합당한 대가가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은 퍼렇게 멍든다. 그러면 ‘삐뚤어질 거야!’라는 생각으로 ‘더는 이렇게 당하면서 살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하게 된다.

이와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인정받는 꼴을 보지 못하거나, 내 뜻대로 되지 않아 실망하거나... 이러한 이유로 흑화된 신구약 인물이 있다. 먼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을 꼽을 수 있다. 그가 왕으로 선택받았을 때 보인 반응을 참고하면, 담대하게 사람을 죽일만한 위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여느 보통의 사람들처럼 겁도 많고 소심하기까지 했다. 결코 대범하게, 잔인하게 사람을 죽일 정도로 극악무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위기에 내몰리고, 다윗이 더 잘 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결국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으로 흑화된다. 신약에서는 배신자의 대명사가 된 가룟 유다를 꼽을 수 있다. 그는 회계를 맡을 정도로 머리가 비상한 제자였다. 성경은 그를 그냥 따르는 아무개가 아니라 '열둘 중의 하나' 곧 제자였다는 점을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한다. 그 역시 처음에는 순수한 동기로 예수님을 따랐겠지만, 십자가에 실망하고 돈을 몰래 빼돌리는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흑화된다. 이 둘의 공통점은 자신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새 흑화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나쁜 상황에서도 좋은 것만 배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좋은 상황에서조차 꼭 못 된 것만 골라서 배우는 사람이 있다. 우리의 마음은 보고 배운 것으로 물든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떤 태도로 반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타락과 변질은 ‘간발의 차이’로 나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깻잎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 순교자와 배교자가 동시에 나온 걸 보면, 누가 ‘나는 아니지요?’라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할 수 있을까! 여담이지만, ‘나는 절대 그럴 리 없다!’라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도 보기 좋게 넘어졌다. 나도 그 사람일 수 있음을, 그도 나였을 수 있음을 생각하니 섬뜩하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제일 위험하고 위태로운 사람은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나도 별수 없는 인간’일 수 있다는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이, 그나마 희망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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