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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과 떨림 Dec 26. 2022

은혜도 날로 먹으면 탈 난다.

매일 밥상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하던 숟가락이, 언제부터 ‘계급론’에 휩싸이면서 졸지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얻게 되었을까? 한때 숟가락은 영화배우 황정민 씨의 수상 소감 덕분에 감동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었다. 황정민 씨는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음에도 거들먹거리지 않았다. 스크린 속에서는 완벽한 연기를 펼친 그였지만, 수상 소감은 투박하기 짝이 없었다. 완벽함보다 투박함에서 그의 진심이 더 진하게 느껴졌던 건, 비단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닌 듯하다. 그는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눈물겨운 고생을 했는지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았다. 대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생한 스태프에게 공을 돌렸다. 그는 수십 명의 스태프가 주인공 한 사람을 위해 밥상을 차려놓았고, 그러면 자기는 그저 밥상에 숟가락을 얹어서 맛있게 먹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 ‘밥상 숟가락’을 시작으로 천편일률적이던 수상 소감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던 것 같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의 수고를 누군가 알아줄 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많은 사람이 감동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남들보다 더 수고했다고 여기저기 셀프 칭찬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기껏 손발로 고생해 놓고 입으로 다 까먹는다는 점에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반대로 자기의 공로를 함께 했던 동료들에게 돌리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어디를 가나 사랑받고 환영받는다.


밥상 숟가락이 나와서 말인데, 자격 없는 사람에게 한 식탁에서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건 그야말로 은혜다. 다윗은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이었던 므비보셋을 제거하지 않고, 왕의 식탁에 숟가락을 얹도록 자비를 베푼다. 세상에서는 정권이 바뀌면 숙청과 유배가 시작된다. 그런데도 반역의 씨앗을 뿌리 뽑지 않고, 도리어 왕의 식탁에서 먹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파격적인 은혜를, 성경은 ‘헤세드’라는 말로 표현한다. 변화는 말도 안 되는 은혜를 입었다고 느낄 때 일어난다. 우리 인간은 안다고 했을 때보다, 느낄 때 비로소 변한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것이 변화의 연료가 된다. 주변에 보면, 은혜를 입었다고 하지만, 어제도 오늘도 다 된 밥에 숟가락만 얹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이유 가운데는,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정신이 담겨있다.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받아 누린 대로 누군가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었던 이유도, 그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아니,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가운데 슬쩍 숟가락만 얹으려는 태도가 몸에 밴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온갖 혜택은 다 받아 누리고 싶지만, 헌신이나 대가는 치르고 싶지 않은 것이다. 혜택만 누리고 헌신은 꺼리는 근성을, 나는 ‘무리 근성’이라 부른다. 무리도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따랐지만, 어디까지나 혜택을 보기 위해서였다. 자기 부인이나 자기 십자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주식을 해결해 줄 때만 주님이었고, 그들에게 고마움은 예수님을 통해 덕을 봤을 때뿐이었다.


어디를 가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 ‘뛰는 놈, 나는 놈’ 그리고 ‘묻어가는 놈’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라는 말은 알겠는데, ‘묻어가는 놈’도 있다니 조금 생소할지도 모르겠다. 실력 차이를 떠나, 뛰는 놈이나 나는 놈 모두 요령 피우지 않고 땀을 흘린다는 점에서 박수받을 만하다. 그런데 ‘묻어가는 놈’은 이 두 사람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 힘 하나 들이지 않고 혜택만 보는 얄미운 사람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날로 먹는 놈’이라 할 수 있다. 대개 이런 사람은, 신앙은 초보에 머물러있으면서 눈치는 백 단이다. 그래서 어떻게 처신해야 인정받는지, 어떤 자리에 서야 칭찬받는지, 누구와 함께 있어야 혜택을 보는지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다. 눈치로 온갖 혜택을 누릴지는 몰라도,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를 순 없다. 항상 유리한 쪽에 서서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이익만 보는 사람의 내면이 건강할 리 없다. 단단할 리도 없다. 우리는 나 역시 자격 없는 자로서, 왕의 식탁에 숟가락을 얹는 은혜를 입었다는 걸 피부로 느껴야 한다. 그래야 날로 먹으려는 무리 근성을 뿌리치고, 받은 은혜에 감사하면서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다. 황정민 씨처럼 고생했음에도 뻐기지 않고 겸손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 은혜도 날로 먹으면 탈 난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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