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는 폭설이 내린 다음 날 남자친구와 거리를 걷다가, 길가에 놓인 아담한 눈사람을 사정없이 걷어차며 크게 웃는 남자친구를 보고, 결별을 결심했다. -이적의 단어들 / 이적-
우리의 민낯은 ‘작은 자, 약한 자, 소외된 자’를 대하는 태도와 방식에서 드러난다. 식당 종업원에게 막말을 일삼는다? 환경 미화하는 분들을 하대한다? 장애인을 업신여긴다? 나는 이런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대개 이런 부류는 강한 자 앞에서는 약하고, 약한 사람 앞에서는 강하다. ‘강약약강’은 이들이 약육강식의 세상을 살아가는 전략이다. 비록 눈사람에 불과하지만, 사정없이 걷어차는 사람을 믿고, 평생 함께 살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같은 부류라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를 도와 식당 일을 거들며 컸다. 때론 주유소에서 알바를 했고, 때론 시장에서 물건을 팔았다. 일찍이 이런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을, 너무나 만만하게 여긴다는 걸 체감했다. 그래서였을까? 온갖 종류의 진상을 만났다. 입에 담지도 못할 음담패설을 일삼는 손님이 있지 않나, 괜히 생트집을 잡아서 기어코 왕 대접을 받으려는 손님이 있지 않나, 작은 실수에도 분을 못 참고 쥐잡듯 잡는 손님이 있지 않나.
인간은 자기보다 높은 사람 앞에서는 알아서 정신줄을 꼭 붙잡는다. 말과 행동을 그렇게 조심할 수 없다. 알아서 긴다. 아니, 알아서 모신다. “밉보였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자기보다 낮다고 생각되는 사람 앞에서는, 너무나 쉽게 정신줄을 놓는다. 이때 정신없는 말과 행동이 필터를 거치지 않고 나간다.
누군가 악의적으로 한 게 아니라면, 실수한 건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편이다. 특히 내가 일했던 ‘식당, 주유소, 매장’에서는 평소보다 더 조심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아마도 20~30년 전에, 나도 그 사람들의 입장과 비슷한 처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매번 불친절하거나 맘에 들지 않다면? 안 가면 그만이다!)
“누군 이 일 안 해 본 줄 알아?” 왕왕 이렇게 말하는 ‘진상 오브 진상’이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 제일 사악하다고 생각한다. 자기의 경험을 이해하는 용도로 선용하지 않고, 쥐어짜는 용도로 악용하니까 말이다. 상급자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 그 사람의 처세술이 보이고, 하급자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가 보인다. 문제는 처세술을 배우려는 사람은 많아도, 됨됨이를 배우려는 사람은 적다는 것이다. 그래서 능력 많은 진상이 많은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이로운 존재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건 내 주변 사람들이 판단할 문제다. 적어도 해로운 존재는 되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