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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아뜨리 조 Mar 30. 2016

소금사막의 밤 2

 그 여름의 산들바람처럼......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제 아내도 산후우울증을 앓은 적이 있어서...... 아무튼 수지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잘 신경 쓰고 지켜보겠습니다. "

 그 날의 얘기는 여기서 끝이 났다. 나는 황량한 복도 끝 교실에 그를 남겨 두고 그곳을 떠나 왔다. 그리고 며칠 후 그에게서 한 통의 문자가 날아왔다.

 "많이 당황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동병상련의 감정이랄까. 수지를 향한 어머님의 마음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된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올 한 해는 아무 걱정 없이 수지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

 의례적인 인사였지만 문자가 온 시간은 밤 열 시가 넘었기에 나는 스산한 가슴을 한 번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 묘한 흔들림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느 봄 날, 곧 떨어질 꽃잎의 작고 환한 그늘이 주는 설렘은 분명 계절 탓이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 버렸다.


 아침을 차리고 출근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내게 수지는 매일 같이 반찬 투정을 했고 끝에는 화를 냈다.

 "엄마가 잘하는 게 도대체 뭔데? 가구 잡지에 다니면서 집안 인테리어는 엉망진창이고 반찬도 제대로 된 게 없잖아. 결혼생활이라도 잘 하든가"

나는 참다못해 가끔 수지에게 손을 대기도 했다. 때리고 나서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는 순식간의 반응이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수지와 함께 여름휴가를 계획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여름방학, 나는 양평에 있는 친정 부모님 댁으로 수지를 보내버렸다. 수지는 군말 없이 짐을 쌌고 나는 수지를 낳은 이후 처음으로 혼자서 여름휴가를 보내게 되었다. 나는 늦잠을 자고 휴가철이라 한산한 시내를 배회하는 것으로 휴가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휴가 첫날, 폭염이라는 일기예보를 보며 소매가 없는 원피스를 입고 책을 많이 넣을 수 있는 캔버스 백을 들고 교보문고로 갔다. 샌들 바닥으로 쩍쩍 아스팔트가 달라붙을 것 같았다. 서점의 유리문으로 비친 내 모습이 옛 시절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나쁘지 않았다.

 서점 안을 헤매던 나는 어느새 여행 서적 코너에 와 있었고 남미 여행기를 들춰보고 있었다. 그동안 수지가 유치원에서 초등학교로 옮겨 가고 학년이 바뀌었을 뿐 내 안의 세월은 멈춰 있었다. 남편과 헤어지며 내가 지켜야 할 한 생명을 위해 나는 내 안의 여자도 잊고 살아왔었다. 수지는 애완견도 아니었고 내가 살아갈 이유도 결코 아니었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멀리 떠나고 싶어. 아주 멀리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생이 조금 가벼워질까. 티티카카호의 사진이 표지에 실린 책을 집으려고 했을 때 누군가가 인사를 건네 왔다.

 "수지 어머님 맞으시죠"

 김영우 선생이었다.

 "아.... 수지 선생님"

 나는 화들짝 반가운 척을 하며 들켜버린 눈물을 무마시켜 보려 했다.

 "시원한 냉커피 한 잔 드시겠습니까?"

 우리는 서점 옆의 대형 커피숍 이층에 자리를 잡았다. 얼음이 가득 담긴 캐러멜 마키아토에는 그와 나의 어색함을 대신하는 듯 물기가 땀처럼 맺혀 있었다.

 "학교에서 수지는 어떤가요?"

 한참 뒤에 내가 겨우 말을 꺼냈다.

 "지금 보니 수지가 어머님을 많이 닮았군요. 멀리서도 어머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수지를 늘 보기 때문인 것 같네요. 수지는 말이 없고 조용한 아이지요."

 "마음처럼 아이에게 잘 해주는 게 쉽지는 않네요. 부모로 산다는 건 참 많이 힘든 일인 것 같아요."

 그의 눈은 다시금 부드러워져 있었다.

 "결국 제게서 독립하려면 저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시기가 있을 거라고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었는데 막상 시작이 되고 보니 저는 자꾸 예전으로 돌아가고만 싶네요."

 나는 마치 긴 시간을 거슬러 말이 잘 통하는 동급생과 커피숍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랬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사귈지 말지 아직 결정이 되지 않은(그쪽이 나를 좋아하는지 확실이 알지는 못하지만 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닌 게 확실한) 남학생이 전화를 걸어와 커피숍으로 불러내곤  하던 시절. 수지에게 들은 바로는 김영우 선생의 나이도 나와 동년배였다. 그런 시절로 돌아가도 좋을 만큼 젊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미세한 기미들을 모두 놓아버리기엔 아직 이른 것이 우리들의 나이가 아닐까.

 "그래도 그런 관심만으로 수지는 행복한 아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살짝 미소 짓는 그의 얼굴에서 그 시절 남학생들에게서 보이던 생동감 있는 호기심이 느껴졌다.

 "선생님 자녀분은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그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지금...... 이곳에 없습니다. "

 갑자기 에어컨 바람이 세진 것일까. 어디선가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어디 외국에라도?"

 "시원한 맥주라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대답 대신 그는 자리를 옮기자고 말하고 있었다. 자리를 옮긴 곳은 지하에 위치한 대형 생맥주 집이었다. 그와 나는 칸막이가 쳐진 구석으로 자리를 잡았다. 무더운 여름날 오후, 전 세계의 냉장고 문이 한꺼번에 열린 것처럼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나자 나는 앞에 앉아 있는 그가 수지의 담임이라는 것마저도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 역시 자신의 앞에 놓인 생맥주 한 잔을 쉽게 비워냈다.

 "왠지 오늘은 누군가를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었는데 그게 수지 어머님 이셨군요."

 나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기선혜...... 명함이 아니어도 이미 알고 있었는데요. 제출하신 주민등록 등본을 봤거든요."

 그랬구나. 순간 아득해졌던 나는 가슴을 조용히 쓸어내렸다.

 "제 아이가 살아있었다면 아마 수지보다 한 학년 아래쯤 이었을 겁니다. 눈이 크고 겁이 많은 남자아이였죠. 다섯 살이었어요. 누구에게나 제일 예쁜 나이지요. 그 애는 나이를 먹을 수 없는 영원한 다섯 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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