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에타이|발가락이 먼저 말해줬다

PART 2. 실험 훈련 & 선별

by 수련의기록

치앙마이에서 한 달을 지내며, 스스로 선택한 날들을 기록합니다. 원하는 삶은 우연이 아니라, 실행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 글이 독자에게 생각해왔던 것을 한 번쯤 해볼 수 있는 작은 용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해외로 다니는 일이 나에게 잘 맞지 않을까?'


대학을 졸업하고 가장 간절히 원했던 일은 승무원이었다. 여행을 좋아했다. 서비스업이 잘 맞았고, 세상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학원을 다니고 스터디를 하며 1년을 준비했다. 채용 시즌이 오면 국내외 항공사를 가리지 않고 지원했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


면접을 보러 갈 때마다 놀란 점이 있었다. 성격은 비슷한데, 더 키가 크고, 더 어리고, 더 예쁜 지원자들이 만 명도 넘게 있었다는 것. (여행을 좋아하면서 사람들과의 만남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그들 사이에서 나만의 장점이 무엇인지 끝내 찾지 못했다. 스스로 비교하면서 안되는 이유들만 찾았다. 마지막으로 싱가포르 항공 탈락 메일을 받았을 때, 승무원을 포기했다. 이젠 어디로 가야할지 목표도 상실한 기분이었다.


그 이후로 한동안 침대에만 있었다. 먹고 자고를 반복했다. 점심으로 밥을 한공기 먹고 과일을 먹고 과자를 먹고 아이스크림 한 통을 비우고 초콜릿을 먹었다. '이렇게 먹고도 또 먹을 수 있나?'하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먹었다. 더 먹으라는 얘기를 끊임없이 누군가가 속삭이는 느낌이었다. 석 달 만에 10kg이 늘었다. 하루 네 시간도 집에 있지 못하던 내가, 방문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 시기의 나는 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떠오른 건 동네 복싱장이었다. 퇴근길에 네온사인 간판이 반짝이는 곳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불어난 몸을 일으켜 도장에 갔다. 안에서는 ‘퍽퍽’하고 울리는 샌드백 소리와 “잽, 라이트!” 하는 외침이 들렸다. 소리에서 사람들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등록하시려고요? 허허허.”
“네, 다이어트 하려고요...”


관장님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대답했다. 모르는 사람의 눈을 보고 얘기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웃으며 반겨주셨던 모습 덕분에 안전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음 날부터 복싱을 배우기 시작했다.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하루가 달라졌다. 땀을 내고 오면 얼굴이 헬쓱해 보였다. 어제보다 조금 나아진 느낌도 들었다. 주 2회 가던 복싱은 어느새 주 4회가 됐고 6개월을 꾸준히 다녔다. 다이어트가 목적이었는데, 어느날 관장님은 대회에 나가보라고 신청서를 건네 주셨다. "제가 대회를요?" 고민하다가 더 이상 뒤로 갈 곳도 없다는 생각에 참여를 결심했다. 그렇게 나간 구 생활체육 대회에서 운이 좋게 3등을 했다.


첫 두 판은 수월하게 이겼지만 준결승에서 셀 수 없이 많이 맞았다. 턱을 맞을 때마다 머리가 흔들렸고 주먹만 날아와도 눈이 먼저 감겼다. 링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온 몸을 떨고 있었다. 아무리 가드를 올려도 수없이 날아오는 주먹에 정신이 흐려졌다.(준결승에 만난 상대방은 우승했다.) 그날 이후 복싱을 그만뒀다. 위험한 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느낀 고통을 누군가에게 다시 줄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날은 뜨겁고 수강생들의 열기로 가득했던 무에타이 도장. 수련중인 나




그런데도 태국에 와서 무에타이를 배우고 싶었다. 태국이 본 고장인 무술이니까. 그리고 초보라서 '샌드백만 치다가 가겠지?'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무에타이를 배웠던 친구가 호신술로 제격이라고 했던 말도 떠올랐다. 호기심을 갖고 도장에 들어서자 번쩍번쩍한 옷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황금색에 호랑이 무늬, 챔피언 밸트까지 프린트된 반바지가 보였다. 치앙마이는 해가 뜨면 30도에 가까운 더위가 계속되는 나라다. 남성 수강생들은 상의는 입지 않고 수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바지에 모든 장식이 집중되어있었다. 반짝이는 바지는 한번 입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수업 시작 5분 전, 20명의 각기 다른 국적의 수강생들로 이미 실내는 열기로 가득했다. 오래 다닌 수강생들은 눈빛이 날카로웠다.


“안녕하세요, 오늘 처음왔어요. 체험하려고요.”
“잘 왔어요. 이름이 뭐예요?”
“케이트라고 해요.”
“좋아요. 단체로 체조를 할 텐데, 체조 끝나면 링 위로 올라오세요.”


가볍게 하려던 내 생각과 달리 체조는 일반 체조가 아니었다. 20명이 줄을 지어 쉬지 않고 움직였다. 뛰면서 스쿼트하고, 런지하고, 펀치하고, 발차기하고. 내가 늦어지면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도 늦어졌다. 쉴 수가 없는 구조였다. 20분 만에 땀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아직 아무것도 안 배웠는데 이미 배운 느낌이다… 집에 가도 될 것 같은데,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거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코치님과 1:1로 기본 동작을 배울 땐 익숙한 동작을 했다. 잽과 라이트. 복싱과 비슷했다. 문제는 발차기였다. 샌드백을 코치님의 배에 대고 차라고 했을 때부터 주춤거렸다. 사람을 차도 되는걸까? 살짝 차보니 내 발차기가 약하다고 느꼈는지, 갑자기 코치님이 샌드백을 치웠다. 그리고 자기 배를 가리켰다. 직접 차 보라고 했다. 그 순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괜찮다고 한번더 얘기해서 천천히 차보았는데, 맨발에 닿는 살의 감촉이 이상했다. ‘이걸 배워서… 어디에 쓰지?’라는 생각이 스쳤다. 코치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쓰러지는 시늉을 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복싱하던 날의 기억이 동시에 떠올랐다.




에너지 넘치는 코치님들. 장난끼가 넘치는 성격이었다.




'아, 나는 격투를 할 사람이 아니구나.' 1시간 반의 수업이 끝나고 인사를 하고 나왔다. 그리고 확신했다. 무에타이는 오늘 하루 체험으로 충분하다고.


그날 저녁, 샤워를 하다 발가락에 있는 검은색 반점을 발견했다. 앗, 자세히 보니 피멍이었다. 오른발 두 번째 발가락 사이에 선명하게 피멍이 들어있었다. 상대방의 종아리를 차는 로우킥을 배우다 발가락 뼈가 잘못 맞은 모양이었다. ‘자칫하면 다른 운동도 못할 뻔 했잖아?’ 놀라며 눌러보니 다행히 크게 아프진 않았다. 빠르게 약을 바르고 침대에 누워서 생각했다.


나에게 맞지 않는 운동도 분명히 있구나. 그렇게 배워보고 싶었던 건데 해보니 알겠다.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했다. 다만 방향이 맞다고 느껴지는 것을 더 열심히 하자고 다짐했다. 무에타이는 나를 강하게 만들 수 있는 운동이었지만, 오래 하고 싶은 종목은 아니었다.


모든 것을 다 가져갈 필요는 없다. 나에게 맞는 것만 남기고, 아닌 것은 내려놓는 것. 그 또한 훈련이아닐까. 치앙마이에서의 수련은 그렇게 정리됐다. 하고 싶은걸 다 해보되, 다 붙잡지 않는다고. 강해지려는 마음은 유지하지만 방법은 나에게 맞는 것으로 선택하자고.



아니, 정확히는

발가락이 그렇게 말해줬다.








https://maps.app.goo.gl/YDQxLnzuJhES8der5


The Bear Fight Club


- 1회 체험비 : 400바트

- 코치님들이 친절함. 즐거운 분위기. 현역 선수들이 있어 무에타이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곳.

- 사전예약 없이도 방문 체험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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