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킹|도이수텝에서 가져온 마음

PART 2. 실험 훈련 & 선별

by 수련의기록

치앙마이에서 한 달을 지내며, 스스로 선택한 날들을 기록합니다. 원하는 삶은 우연이 아니라, 실행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 글이 독자에게 생각해 왔던 것을 한 번쯤 해볼 수 있는 작은 용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왓 프라탓 도이수텝 사원 안에 들어가니 309개의 계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4.5km 거리의 산을 탔는데, 계단 300개쯤이야. 씩씩하게 올라갔지만 200개쯤 지나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갈걸 그랬나, 생각하고 있을 즈음 주변에 함께 오르던 외국인 관광객들이 파이팅을 외치기 시작했다. 운동복을 입고 온 우리를 보며 트레킹으로 왔냐고 물어보기도 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에 힘이 났다. 헤맨 만큼 내 땅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시작했으니 끝까지 내 발로 걸어가야지. 300개의 계단을 넘고 마침내 나타난 황금색 사원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모든 게 황금색이다. 기둥도 탑도 보이는 모든 건물이 금색이다. 반바지를 입고 온 우리는 다리를 가릴 수 있는 천을 빌렸다. 신발을 벗고 부처의 사리가 모셔져 있다는 황금색 체다(탑)로 갔다. 카이와 PK가 태국사람들은 이 탑의 주변을 3바퀴 돌면서 소원을 빈다며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함께 걸으며 무사히 도착한 것에 대한 감사와 새로운 인연에 대한 감사, 그리고 모두의 건강을 바라는 소원을 빌었다.




다 온 줄 알았더니 300개의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처의 사리가 모셔져 있다는 황금색 체다(탑)





"우리 스님에게 가자!"

"스님? 어디로?"


갑자기 둘이 눈빛을 주고받더니 스님을 만나야겠다고 했다. 사원 안에 불상이 있는 방에 들어가서 스님 앞에 앉고 있었다. 나도 머뭇거리다가 카이 옆에 앉았다. 여행을 다니면서 스님을 마주하고 앉아본 적은 처음이다. 스님은 천천히 질문을 건넸고 친구들은 대답을 하며 말을 주고받았다. 물론, 모든 대화는 태국어였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타이밍도 감으로 맞췄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불편하지 않았다. 말의 뜻은 몰라도, 어떤 흐름인지 알 수 있었다. 언어가 달라도 어떤 말들은 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스님이 조용히 물을 떠 머리 위에 흩뿌리며 축복을 건넸다. 나중에 물어보니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으니 너무 붙잡지 말라’는 말이었다고 했다. 그 말이 한동안 마음에서 맴돌았다.



스님 앞에서 덕담을 듣는 우리, 그리고 서로의 손목에 하얀색 실을 묶어줬다.




덕담을 듣고 나올 때 하얀색 실을 받았다. PK는 소원을 들어주는 실이라고 헸다. 상대방을 위한 세 가지 좋은 것을 말해주면서 손목에 직접 묶어주는 거라고 덧붙였다. 실을 묶은 날부터 사흘은 풀지 말고, 일주일이 되기 전에는 풀어야 한다면서. 우리는 하나의 의식처럼 진지한 얼굴로 실을 묶어주기 시작했다. 카이가 내 손목에, 나는 PK에게, PK는 다시 카이에게 실을 묶어주었다. “당신과 당신의 가족이 건강하길, 소망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길, 늘 축복이 함께하길.”이라는 말과 함께.


오늘 처음 만난 친구들이었다. 같은 나라에서 살고 있지도 않았고, 쓰는 언어도 달랐다. 그런데 손목을 잡고 실을 묶는 동안만큼은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느껴졌다. 우리 셋의 영어는 매끄럽지 않았고, 문장이 완벽하지도 않았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카이와 PK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그대로 닿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이유를 붙이기 어려운 감정들이 스쳐 지났고 시간이 정지된 느낌이 들었다. 왜인지 모르게 울컥하는 기분도 들었다. 이 날의 기억은 너무나도 소중해서 마음속 깊은 곳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복권을 보고있는 PK와 무삥(꼬치구이)을 고르는 카이, 무삥을 먹고 힘내서 달려 내려갔다.




사원에서 내려오는 길에 PK는 운이 좋은 날인 것 같다며 복권을 샀다. 그냥 고르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계단의 수를 세고, 오늘 있던 일들을 하나씩 의미 있는 숫자로 바꿔가며 신중하게 복권을 골랐다. 치앙마이에서는 뽑기처럼 숫자를 뽑는 가판대가 종종 있다. 종이를 뽑아서 가지고 있다가 매월 1일과 14일에 발표되는 당첨 번호와 맞춰 보는 방식이라고 한다. "복권에 당첨되면 뭘 하고 싶어?" "카이를 데리고 한국에 갈게. 가서 맛있는 거 사줄게. 기다려." 그 말이 진지해서, 한국에 돌아와서도 한동안은 복권 발표일을 기억하게 됐다. 아쉽게도 연락은 없었지만.


카이는 우리가 아침도 안 먹은 상태인데 공복으로 오래 있으면 안된다며 무삥(꼬치구이)을 사줬다. 치앙마이 마지막 날에 먹는 첫 무삥이다. 돼지고기 무삥과 닭고기 무삥을 하나씩 먹으면서 슬쩍 물어봤다. “택시를 타고 가는 건 어때?” 그리고 단칼에 거절당했다. 트레킹을 하러 온 거라고 내려가는 길은 훨씬 빠를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이다. "그렇지 트레킹을 하러 온 거지. 고작 왕복 10km인데 말이야." 고개를 끄덕이면서 꼬치구이를 두 개 더 먹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가져온 에너지젤도 챙겨 먹었다.


친구들의 말이 맞았다. 내려오는 길은 훨씬 쉬웠다. 일단 한번 와 본 길이라 그런지, 더 이상 길을 찾느라 멈출 필요도 없었다. 트레킹 선배에게 산을 잘 내려가는 요령도 배웠다. 보폭을 줄이고 몸의 중심을 살짝 뒤로 두고 가볍게 뛰는 것. 그대로 따라 해 보니 확실히 안정감이 있었다. 괜히 무림의 고수가 된 듯한 기분도 들었다.


내려오면서 문득 택시를 타자고 했던 내가 조금 부끄러워졌다. 혼자였다면 중간쯤에서 타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함께였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살폈다. 앞에선 속도를 맞춰주고, 뒤에선 따라가면서. 그렇게 걷고 뛰다 보니 어느새 한 팀이 되어 있었다. 함께하면 더 많은 걸 해낼 수 있고, 생각보다 멀리 갈 수 있다는 걸 몸으로 알게 됐다.


다시 왓파랏 사원을 지나 처음 만났던 자리로 돌아왔을 때, 온몸에서 전율이 느껴졌다. 일곱 시 반에 시작한 트레킹은 열한 시 반에 끝났다. 네 시간 동안 산을 오르내리며 걷고 뛰었다. 치앙마이에서의 첫 트레킹을 무사히 마쳤고, 그 시간만큼 우리 사이에도 추억할 수 있는 장면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음식을 주문하는 PK, 친구들의 편지, 트레킹 종료 후 기분 좋은 우리들




“나 부탁이 있어. 태국어로 내 이름을 써줄 수 있을까?”


태국에 입국해서 가장 신기했던 건 태국어로 쓰인 간판이었다. 글자인데 그림 같았고, 문장인데 예술 작품으로 보이기도 했다. 어떻게 쓰는 건지, 어떤 규칙이 있는지 알고 싶었지만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었다. 물어볼 사람도 없었고, 배우자니 시간도 모자랐다. 이름이라도 태국어로 써달라고 하고 싶은데 그럴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눈앞에 태국 친구가 둘이나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도 그들에겐 낯설고 신기할 비장의 무기, 한글이 있지 않은가. 해외에서는 본국의 언어 자체가 선물이 된다.


카이와 PK에게 열심히 편지를 써주었다. 한 번은 한글로 그리고 아래에 영어로 뜻을 덧붙였다. 친구들은 태국어와 영어로 답장을 적어 주었다. 한글도 누가 쓰는지에 따라 글씨체가 다른 것처럼 카이와 PK의 글씨체도 달랐는데, 그게 웃음 포인트가 됐다. PK의 글씨는 정갈하고 반듯했고, 카이는 종이를 들고 연신 웃으며 자기는 글씨를 잘 못 쓴다고 말했다. 삐뚤빼뚤한 글자들이 카이가 산을 오르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소중한 글자들은 지금도 내 옆에 있다. 글을 통해 서로를 조금 더 잘 알게 된 느낌이었다.


음식점에서 나오며 우리는 서로를 꼭 안아주었다. 치앙마이를 떠나는 날, 인연이라는 선물을 하나 더 받아 든 기분이었다. 치앙마이에서 테니스를 치지 않았다면 Magic Brew 카페에 갔을까? 카페에서 리차드와 에릭을 헷갈리지 않았다면 프레드를 만났을까? 프레드를 만나서 도이수텝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여기 올 생각을 했을까? 치앙마이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무슨 트레킹이냐며 그냥 숙소에 있었다면 카이와 PK를 만났을까? 오늘 이 기억들을 그대로 가지고 돌아갈 수 있었을까.



나는 그날 저녁 12시 비행기로 한국에 왔다. 손목에 묶어둔 하얀색 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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