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9일 화요일
여느때와 다름없는 새벽이었다. 출근을 위해 새벽 2시 50분에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아내와 아이들이 잘 자고 있는지 살폈다. 아이들에게 이불을 다시 덮어주고 조용히 거실로 나왔다. 아내와 아이들이 자고 있는 안방 문은 살며시 닫았다. 안방에서 거실 화장실까지 거리가 좀 있지만, 새벽 시간대는 주변이 고요해서 혹시라도 물소리가 들릴 염려가 있었다. 아내는 잠귀가 밝고, 중간에 깨면 다시 잠들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작은 물소리에도 깨는 경우가 있어서 안방 문과 거실 화장실 문을 닫는 건 필수다. 문을 닫고 화장실에 들어오면 모든 준비는 끝났다. 수도꼭지를 온수 방향으로 돌리고 샤워기를 튼다. 뜨거운 물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양치를 한다. 평상시라면 양치가 끝나기 전에 따뜻한 물이 샤워기를 통해 나온다. 온수가 나오는 걸 확인하면 수도꼭지를 잠그고 양치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다시 수도꼭지를 틀어서 샤워기 헤드에 나오는 온수로 머리를 감는다. 여기까지가 출근 전 일어나서 씻기까지의 과정이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화장실에 들어와서 양치하는 것까지는 똑같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온수가 나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양치하는 동안 뜨거운 물이 나오는데, 오늘은 중간에 확인해도 차가운 물만 나왔다. 어제 자기 전 일기예보를 확인했을 때 오늘 새벽이 어제보다 더 춥다고 나왔는데 그 영향인가 싶었다. 양치를 마무리하고 머리를 감기 위해 샤워기를 들었다. 머리카락에 물이 닿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칠 정도로 물이 차가웠다. 얼음장 같았다. 다시 한번 수도꼭지의 방향을 살폈다. 혹시나 냉수 쪽으로 되어 있나 확인했다. 분명 온수로 되어 있었다. 샴푸를 하는 것도 잊은 채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을 바라봤다. 보일러가 죽었다는 걸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탄식이 나왔다. 불현듯 예전에 있었던 사건이 떠올랐다.
4년 전, 이 집에 이사오기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날따라 유난히 추웠다. 추운 만큼 열심히 운동해서 땀을 쫙 빼고 집에 왔다. 샤워를 하기 위해 온수를 틀었다. 샴푸를 할 때만 해도 분명 뜨거운 물이 잘 나왔었다. 그런데 머리를 헹구는 동안 점점 물의 온도가 낮아지더니 급기야 냉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씻고 있는 중이었기에 중간에 멈출 수가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샤워를 끝냈다. 군대에 있을 때 이후로 한겨울에 냉수 샤워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와 아내는 찬물로 어찌저찌 씻을 수 있다 치지만, 우리 아이들은 그럴 수 없었다. 그 당시 아들은 5살, 딸은 3살이었다. 둘째는 아직 기저귀를 하고 있을 때여서 저녁에 꼭 엉덩이를 씻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겨울에도 땀띠가 나서 고생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냉수로 씻으면 무조건 감기에 걸린다. 이 상태라면 샤워는 불가능했다. 곧바로 보일러 고객센터에 전화했다. 금방 접수가 되어서 기사님이 오시길 희망했지만, 우리집처럼 보일러가 말썽을 피우는 집이 많았다. 빠르면 다음날 오후가 되어야 방문할 수 있다고 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세면대에 찬물을 절반 받고, 거기에 커피포트기로 데운 물을 부어서 온도를 조절한 다음 아이들을 세면했다. 그리고 둘째는 물티슈로 엉덩이를 닦아줬다. 마침 그날 저녁에는 기저귀에 큰 볼일을 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음날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간 사이에 기사님이 예정 시간보다 일찍 오셨다. 우리 앞에 접수했던 몇 집이 무슨 이유인지 취소해서 일찍 올 수 있었다고 했다. 온수가 무사히 나오는 걸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사님이 오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일러가 되살아난 덕분에 그날 저녁에는 전날 못한 것까지 포함해서 아이들을 개운하게 샤워시켰다.
4년이 지났어도 아직 첫째는 9살, 둘째는 7살이었다. 찬물 샤워는 어림없었다. 요즘 독감도 유행하고 있어서 더욱 조심해야 했다. 겨울이어서 여름처럼 땀을 흘리지 않으니까 하루 정도는 아이들 샤워를 시키지 말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첫째가 매일 저녁에 태권도를 갔다 온다. 태권도를 다녀오면 땀에 흠뻑 젖어 있다. 그래서 자기 전에 무조건 샤워를 해야만 한다. 가장 좋은 상황은 아침이 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온수가 정상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아내가 기상하면 다시 확인해보기로 일단 결론지었다. 그리고 급한 대로 얼음장 같은 찬물로 씻고 출근을 했다.
아침 8시쯤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미리 보낸 카톡을 확인하고 온수를 틀었지만, 여전히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첫째를 등교시키고 오는 길에 혹시나 해서 관리사무소에 다녀왔지만, 보일러는 고객센터에 문의해야 한다고 했단다. 아내의 말을 듣고 나는 고객센터에 접수하자고 답했다. 접수는 금방 되었지만, 방문 일정은 담당 기사님에게서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 정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전까지 직접 집에서 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는지 찾아봤다. 온수가 나오지 않아서 보일러를 확인했을 때 에러코드가 뜨지는 않았다. 에러코드가 보이지 않으면 심각한 정도는 아니라는 걸 4년 전 사건을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가장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든 방들의 난방을 30분간 켜놓는 것이었다. 그러면 보일러 내부에 있는 에어가 빠지면서 온수가 다시 나올 수도 있다고 했다. 이 사실을 아내에게 알려줬다. 아내는 바로 실행에 옮겼다. 난방을 켜고 40분 정도 지났을 때 화장실 세면대의 온수를 틀었다. 조금 있으니 놀랍게도 따뜻한 물이 나온다고 했다! 아내의 전화를 받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생각보다 간단히 해결되는구나 하고 안심했다. 온수도 나온다고 하니 퇴근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헬스장을 갔다.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운동을 할 수 있어서 다른 날보다 더 기분 좋게 매진했다.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헬스를 하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 샤워를 하기 위해 물을 틀었다. 새벽과 달리 정말로 따뜻한 물이 나왔다. 그런데 어제 멀쩡하게 잘 나올 때보다는 온도가 좀 낮은 느낌이었다. 기분 탓인가 싶어서 계속 씻고 있는데, 점점 따뜻함이 줄어들었다. 새벽처럼 얼음장 같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이 씻기에는 차가운 정도까지 이르렀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지금 온수가 나오지 않아서 연락을 해도, 낮 12시가 넘었기 때문에 오늘은 수리를 받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다는 마음으로 접수를 했다. 다시 머리가 아파왔다.
그렇게 2시간이 흘렀을 즈음, 전화가 왔다. 기사님이었다. 마침 근처에 있어서 20분 안에 오신다고 했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이제 진짜로 해결되었다 싶은 마음에 편안해졌다. 반가운 마음으로 기사님을 맞이했다.
하지만 곧이어 나는 민망할 수밖에 없었다. 기사님이 씽크대의 수도꼭지를 온수 방향으로 틀어 놓고 보일러를 확인하는데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금 지나지 않아 씽크대에서 온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기사님께서 이게 무슨 상황이죠 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당황해서 화장실도 확인해 보겠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화장실에서도 온수가 나왔다. 당황해하는 나를 보던 기사님은 웃으시며, 종종 이러는 경우가 있다며 날이 갑자기 추워지거나 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설명하셨다. 그리고 보일러의 온수 온도를 살피시더니, 온도가 좀 낮게 설정되어 있었네요, 하시며 온도를 조금 더 올리셨다. 온도가 낮게 되어 있어서 차갑게 느껴졌을 거라고 말씀하시고는, 보일러에는 아무 문제 없다며 출장비도 받지 않으시고 가셨다. 나는 괜한 걸음을 하게 해서 죄송하다고 인사드렸다. 그리고 가시는 길에 드시라며 음료수를 드렸다.
기사님이 가시고 나는 다시 보일러실로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있었다. 기사님이 하신 말씀 중 두 가지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첫째, 나도 그렇고 아내도 보일러의 온수 온도를 건드린 적이 없다. 이 집에 이사 온 이후 보일러의 온수 온도는 처음과 같았다. 그 온도로 어제까지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온수 방향으로 최대한 돌리면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물이 잘 나왔다. 하지만 기사님이 온수 온도를 이전보다 올렸는데도, 지금은 그 정도로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는다.
둘째, 온도가 낮게 되어 있어서 차갑게 느껴졌을 물이 아니었다. 새벽에 내가 경험한 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뒷골이 당길 정도였다. 온수 쪽으로 끝까지 돌렸어도 그랬다. 지금도 내 두피에 그 느낌이 남아 있다. 4년 전 경험을 토대로 이건 확실히 보일러에 문제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거라고는 난방을 켠 것밖에 없는데, 보일러가 다시 살아났다. 수리를 하지 않고도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건 정말 다행이지만,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드는 건 부인할 수 없었다.
지금 이 글을 마무리하는 2025년 12월 10일 새벽 6시 20분, 우리집 온수는 다행히 잘 나오고 있다. 출근하기 전 온수로 따뜻하게 잘 씻고 나왔다. 그래도 편하게 마음을 놓지 않고 있다. 언제 다시 또 보일러가 죽을 지 모르기 때문이다. 방심하지 않고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 남은 겨울은 아직 길다. 올 겨울, 보일러와 더 이상 아무 일 없이, 무탈하게 지나가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