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사람으로 위로받는다.

2025년 12월 23일 화요일

by 지우진

연말이 되면서 지인들과 송년회를 위해 일정을 맞추고 있다. 송년회 또는 망년회로 바쁜 사람들이 많을 요즘이다. 올 한 해 이런저런 이유로 보지 못하던 사람들도 이즈음에는 볼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 반대로 거절할 핑계를 찾는 게 어렵기도 하다. 앞으로 계속 관계를 이어 갈 사람이라면, 가기 귀찮거나 껄끄러워도 얼굴이라도 비추려고 나가는 자리가 송년회다. 주변에 지인이 많을수록 약속을 잡는 건 더 어렵다. 그래서 송년회를 함께하지 못한 사람들은 새해가 되자마자 따로 신년회를 하기도 한다.




결혼 이전의 나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내를 만나기 전'의 나는 주변에 가깝다고 말할 만한 사람들이 열 손가락 안팎이었다. 외부적인 요인을 탓하자면, 이사가 잦았다. 초등학교 세 곳, 중학교 두 곳을 다녔다. 한 학교를 쭉 다닌 건 고등학교뿐이다. 특히 초등학교 4학년 겨울 방학 때는 인천에서 부산으로 지역을 옮기면서, 인천에서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과는 연락이 아예 끊겼다. 그 당시에는 집 전화만 가능했던 시대라 ("여보세요, 혹시 ○○네 집 맞나요? 저는 ○○의 친구 △△입니다." 식의 전화 예절을 도덕 시간에 배웠던 시절이다.) 이사 가기 전에 친구 집 전화번호를 알아오지 못하면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 유니텔 같은 PC 통신이 태동하던 때였고, 컴퓨터도 없는 집이 많았기에 지금처럼 검색해서 찾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부산으로 와서도 중학교 2학년 겨울에 다른 동네로 가게 되어 여기서 처음 친해진 친구들과 작별할 수밖에 없었다. 친해질 만하면 이사가 나를 가로막았다.


대학교를 가서도 비슷했다. 신부님이 되고 싶어서 진학한 신학대학은 학교 특성상 학기 중에는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해야 했다. 핸드폰 소지는 금지였다. 전화는 학교 내에 설치된 두 대의 공중전화로만 가능했다. 그마저도 정해진 시간에만 할 수 있었다. 인터넷도 마찬가지였다.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사이버실'이라는 곳에서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싸이월드'가 한창 유행이었다. 싸이월드에 있는 나의 미니홈피를 꾸준히 관리했다면, 연락이 끊기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신학대학의 예외적인 상황으로 인해, 신학생 2학년쯤에는 그나마 남아 있던 고등학교 친구들과도 멀어졌다.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갔다 와서는 신학대학을 그만두었다. 사제로서 살아갈 삶에 대한 깊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럼 신학교 동기들과는 어떻게 되었느냐. 이전처럼 또 관계가 끊어졌을까? 다행스럽게도 그러지 않았다. 그 친구들과는 꾸준히 연락을 하고 지냈다. '아내를 만나기 전'의 내가 가깝다고 말할 만한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신학교를 그만두고 편입하랴, 공무원 시험 준비하랴 바빴어도 매해 여름과 겨울에 두어 번은 꼭 만났다. 나는 일반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지만 주례와 사회 모두 이제는 신부님이 된 내 동기들(사회자는 나랑 동갑, 주례를 맡은 친구는 빠른년생이어서 나보다 한 살 어리다!)이 맡아줬다. 덕분에 그날 참석한 분들은 이색적인 결혼식을 경험하셨다. 나와 아내도 물론이고.


안타깝게도 신학교 동기들과의 만남은 2019년이 마지막이다. 결혼하고 아이들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여서 집에서 아내와 육아를 하느라 정신없던 이유도 있지만, 신부님이 된 동기들도 그에 못지않게 바빠진 탓도 있었다. 타 지역으로 간 녀석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삶의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만났을 때 나누는 주제가 확연히 달랐다. 나는 육아를, 그 친구들은 신자들을 어떻게 인도하고 성당 운영은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를 주로 이야기했다. 단순히 관심사가 다른 수준이 아니었다. 현재 고민하는 영역 자체가 달랐다. 삶을 대하는 가치관이 달랐고, 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후 간간히 인스타나 카톡으로 안부 인사 정도는 나누고 있지만 언제 만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비록 지금은 만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신학교 동기들과는 연락이 끊기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어렸을 때처럼 이사를 가지 않아서? 편입과 공무원 시험 준비로 나는 서울에 4년 동안 있었다. 학창 시절 이사는 내 의지가 아니었지만, 서울에서 공부를 하는 건 내가 원해서였다. 선택의 주체가 나였다. 더욱이 무조건 합격을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부산에 있는 동기들과 연락이 끊기려면 얼마든지 끊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연락이 이어졌던 이유는 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나를 차지하는 성향의 비중이 바뀌었다. 신학교에 몸담았던 2년 동안 나도 몰랐던, 내 안에 숨겨져 있던 사교성이 확 드러났다. 내가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지 이때 알았다. 외향적인 성향이 더 커졌다. 집에서만이 아니라 밖에서도 목소리가 큰 사람이 되었다.


10대의 나는 내성적인 성향이 강했다. 조용히 지내는 게 편했다. 친구들과 뛰어노는 것보다는 앉아서 책 보는 편을 선호했다. 그래서인지 교우관계보다 학업에 더 집중했다. 척을 지는 사람은 없었지만, 절친이다 말할 수 있는 교우도 없었다. 두루 친했으나 늘 붙어 다니는 친구는 없었다. 내가 친구가 적은 결정적인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외부적인 요인보다 나의 성향 탓이 컸다. 주말이나 방학처럼 쉬는 날에 친구들과 놀았던 추억이 거의 없다.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공부에 매진한 기억이 대부분이다.


그랬기에 나의 고민은 주로 가족과 나눴다. 그때는 그게 좋았다. 나를 제일 잘 아는 건 부모님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20살이 되고 신학대학에 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신학대학의 특수한 상황도 한몫했지만, 20대부터는 달라져야 한다는 걸,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체감했다. 여기에 확신을 가진 건 신학교 입학식 때 학장 신부님께서 해주신 말씀 덕분이다. "나중에 너의 관을 들어주는 건 지금 옆에 있는 너의 동기들이다."





신부님이 된다는 건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신부님은 집이 없다. 성당에 있는 '사제관'이라는 곳에 머물지만, 신부님이 한 성당에 머무는 기간은 짧으면 2년에서 길어야 4년이다. 기간이 끝나면 다른 성당으로 발령받는다. 은퇴하기 전까지는 이런 삶의 연속이다. 그래서 사제를 나그네에 비유하기도 한다.


학장 신부님의 말씀에 나는 압박감을 받았다. 초중고 시절처럼 적당히 친하게 지내면서, 학과 공부에 매진(신학교니까 기도도 열심히)하면 무난히 신부님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이 잘못됨을 직감했다.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신학교 생활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신부님이 되겠다고 신학교에 입학한 이상, 여기서 살아남으려면(어느새 생존의 문제로 다가왔다) 바뀌어야 한다는 건 부인할 수 없었다.


내가 입학한 2007년에는 1학년은 기숙사 건물을 따로 썼다. 2학년부터 대학원생까지는 같은 건물을 사용했지만, 1학년만큼은 학교 내에서도 따로 떨어진 곳에서 생활했다. 자라 온 환경도 각양각색이고, 다녔던 학교도 모두 다른 남자 12명이 모여 한 공간에서 부대끼며 먹고 자고를 1년 동안 하니, 서로 부딪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은 그 친구의 양치질 소리마저 듣기 싫을 때도 있었다.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그만큼 정도 쌓였다. 가족 말고 다른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위로받은 경험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생경했다. 하지만 그만큼 위로받을 때 와닿는 감동이 컸다.


또한 내 생각과 감정을 자신 있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는 '좋은 게 좋은 거다'라고 웬만하면 참고 넘어갔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가족처럼 20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기에,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가 무슨 생각인지, 어떤 마음인지 알지 못한다. 이 과정 속에서 모난 부분이 깎이면서 부드러워지듯 나의 성향이 새롭게 자리잡아갔다.




신학교 생활은 2년뿐이었지만 나를 완전히 뒤바꾸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 시간을 겪고 군대를 간 덕분에 힘들었던 군 생활도 아무 탈없이 건강하게 잘 이겨냈다고 확신한다. 신학교를 그만두고 편입과 공무원 시험 준비로 보낸 4년의 수험생활도 외롭거나 우울하게 지내지 않았다. 사람 간의 관계를 유지하는 게 귀찮고 피곤하게 느껴지던 10대의 나는 이미 없어진 지 오래였다. 무엇보다 가장 다행스러운 건 내성적인 시절의 나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때의 나라면 말도 걸지 못했을 스타일의 사람인 아내를 만나게 된 것도 다 신학교 시절 덕이다. 나보다 더 외향적인 아내의 취향에 맞춰 나의 취향이 바뀌어지게 된 것도, 신학교 시절 1차적으로 나의 성향이 싹 물갈이가 되었기에 가능했다.




지난 주말인 12월 20일, 우리 아들의 어린이집 친구네와 송년회를 했다. 그 집도 첫째가 아들, 둘째가 딸이라서 우리 아이들과 성별이 맞다. 둘째들끼리도 나이 차이가 한 살밖에 나지 않아서 서로 친하게 잘 논다. 부모들도 나와 아내와 나이가 비슷하고, 무엇보다 5년 째 알고 지낸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얼굴을 붉힌 적이 없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아이들도 우리도 늘 즐겁다. 너무 열심히 놀아서 만남 이후에는 대부분 몸이 피곤하지만, 마음은 피로하지 않아서 좋다. 금세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있다. 사람은 사람으로 위로받고 사람 덕분에 더 행복해진다.

1766481045012.jpg 다가올 성탄절도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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