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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필리아 May 10. 2021

친정엄마, 조현병 그것으로부터의 탈출

조현병엄마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지만 어렵다.

평생을 짊어지고 살아야할 커다란 짐이 있다. 그것은 엄마라는 존재이다.


엄마를 떠올렸을때 누군가는 굉장히 행복하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다.

엄마가 해준 따뜻한 밥이 먹고 싶기도 하고, 엄마와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허나 내게 엄마는 조금 다른 존재이다. 30년 넘게 조현병이라는 병을 가진채 살아왔다. 애초 태어났을때 생긴 선천적인 병이 아닌데도 후천적으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 병이 이토록 오래갈지 몰랐다.


그리고 조현병이라는 그 증상은 우리 가족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집에 왔을 때 따뜻한 분위기, 가족다운 분위기보다 어둠이 더 많았던 우리집이다. 


환청으로 하루종일 시달려 꼼짝도 못하고 방안에 서있을 때도 있고, 불안에 어쩔줄 몰라 안절부절 왔다갔다를 반복하기도 하며 때로는 수면제를 먹어서인지 하루종일 잠만 자려한다. 


중학교 시절에는 엄마가 목을 스스로 조르며 죽으려고 한 적도 있다. 사춘기 시절 방황할 겨를 없이 엄마의 아픈 허덕임에 겉으로는 밝게 지내왔지만 내면은 참 우울했다.


엄마의 증상은 시간이 지날 수록 심해지고 있고 약을 빼먹지 않고 먹고 있음에도 쉽사리 회복될 기미가 안보인다. 차라리 암이라면, 차라리 다른 지병이라면 의학적 도움을 받아 하루빨리 회복하기만을 기다릴텐데, 조현병은 답이 안보인다.


나을지 안나을지가 보이지 않는 병이다. 조현병을 극복하고 일상생활을 평온하게 누리며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허나 우리엄마는 너무 오래 병을 앓아왔기 때문일까? 몇 십년 가난에 허덕여서였을까? 엄마의 자존감은 바닥이고 이전보다 혼자서 할 줄 아는게 없어졌다.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나는 못해라고 하는일도 많아졌고, 옷색깔에 집착을 보이기도 한다.


한번은 회색옷을 입고 엄마에게 갔더니 회색옷은 스님같다며 다른옷을 입으라고 한다. 그러더니 자기 옷도 갑자기 벗고 다른옷으로 갈아입는다. 길가에 가는것도 함부로 지나가지 못한다. 길가다가 마주친 사람이 외국인이라면 저 외국인을 보았더니 무섭다고 이야기를 하거나, 우리집에 오는거 아니가? 라며 불안감을 스스로 키우곤 한다. 


엄마에게 가장 심한 여러 증상

환청이 들린다. (고모, 이모등 친인척의 목소리)

피해망상이 심하다. (고모가 날 싫어한다라고 생각)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 걱정이 많다.

색깔, 사물등 특정한 것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

잠을 자지 못할 때도 있다.

아침에 특히 심한 불안을 느낀다.

아버지를 비난하거나 집착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환청, 망상이 조현병의 가장 주된 증상인것을 알면서도 머리로 이해하는것과 내 마음이 받아들이는것은 천지 차이다. 엄마가 환청이 들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 진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화가 올라온다.


 왜 환청을 그대로 듣고만 있냐고 참 바보같고 어리석어 보인다며 엄마에게 모진 말을 한적도 많다. 


"엄마면 엄마답게 행동해! 어른이면 어른답게 행동해!"


아마도 내가 가장 많이 엄마에게 내뱉은 말이 아닐까 싶다. 


평범한 수많은 가정중에 하필이면 조현병엄마에게서 자라서 내 모든 상황이 엄마때문인것 같아 엄마탓을 할때도 많았다. 나의 정신은 낭떠러지 앞에 간신히 서서 버티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와서 정신적으로 의지하려고 할 때 굉장히 그 무게감이 나를 압박했다.


마냥 짓눌리고 마냥 쓰러지고 있을 수가 없었기에, 차라리 내가 선택한 방법은 외면하는 것이다. (단, 엄마에게 매일 전화하며 수시로 안부를 체크하는것을 기본으로 한다.)


내가 엄마의 조현병 증상에 대해 하나하나 다 신경쓰고, 엄마의 우울함을 하루종일 받아주기에는 나쁜 기운이 내게 스며드는것 같았다. 그래서 그걸 듣고 받아줄 시간에 스스로 더 성장하자 결심한다.


내가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내가 행복해야 엄마를 책임질 수 있다. 나의 행복에서 우리엄마가 다른 엄마들처럼 평범하다면 내 인생 최고의 행복일 테지만 내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먼저 나를 행복하게 하는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젠 나이든 엄마를 내가 책임질 나이가 점점 다가옴을 느낄 수록 이렇게 살순 없어라고 끊임없이 내면에서 외쳤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래 라는 강한 결심도 해보지만 가끔 내 모습에서 엄마의 모습이 보일때만큼 소름이 끼친적도 없다. 


도피처는 아니지만 적어도 잠시나마 내가 회피할 수 있는 탈출구는 결혼이었다. 적어도 매일 엄마를 바라봐야 하는 상황은 피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선택이 내게 더 큰 행복을 줄것이라고 믿었으니까.


남자를 고를 때 내 기준은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었다. 몸이 아픈것보다 정신이 아플때 그 여파는 훨씬 더 크게 가족구성원에게 전해진다. 돈도, 명예도, 얼굴도, 다른 모든것보다 정신적으로 온전할 수 있다면 나는 행복할 수 있을것 같았다.


그렇게 내 선택에 최고라고 믿은 정신적으로 건강한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적어도 나 역시도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이 되겠다라는 필승의 다짐을 한채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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