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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안 Nov 27. 2021

아직도 90년대 질문을 하는 한국에 있는 글로벌 회사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

크던 작던 주어진 조건들을 하나씩 따져보면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모든 결정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지만, 그래도 나름 나만의 이유를 찾고 계획을 만들어 실제 결과와 비교하는 것이 재밌다. 어렸을 때는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쉽게 뜨거워지고 너무 감정적으로만 대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계획에서 생기는 차질들은 어느새 너무 자연스러워졌다. 이제는 차가워졌지만, 이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조금의 여유와 인내가 생겼다.


오늘 이야기할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쓰기 위해서 거의 일주일 동안을 생각했다. 과거 나의 경험들 속으로 추억 여행도 여러 번 다녀왔다. 하지만, 내가 쓰고, 나만 보는 글이 아닌 이상, 생각의 과정들을 거쳐야만 했다. 내가 쓴 글이 남들에게 더 멋지게 보이려는 생각이 아니라, 내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글을 통해 어떻게 더 명확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하지만, 타자를 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정답을 찾지 못했다. 더 생각하면 영영 글로 남기지 못 할거 같아서 그냥 써보기로 했다.


영어를 잘하면 좋다. 근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좋을까? 영어를 잘하면 기회가 많다. 10대 때는 영어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 좋은 학교에 지원해 볼 수 있는 기회, 20대 때는 홀로 낯선 해외를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 그리고 30대 때는 10대와 20대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실력을 전 세계에 보여줄 수 있는 기회.



어느 한 헤드 헌터를 통해서 국내에 있는 글로벌 기업의 Language Specialist 포지션을 제안받았다. 제안서를 열어 본 순간 깜짝 놀랐다. 이 회사에서 잡을 제안받다니.. 조금은 놀랍고 기뻤다. 이 회사는 내가 20살 대학생 시절 가장 많이 활용했던 프로그램을 개발한 회사였다. 그때 당시에는 프로그램 사용법을 익히기 위해서 영문 매뉴얼도 구입해서 공부했는데, 이렇게 만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제안을 수락하고, 이틀 뒤에 자신을 프로젝트 매니저라고 소개한 한 여성에게 전화가 왔다. 목소리보다는 말투에서 약간은 나이가 어느 정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은 이상하고 어색했다. 하지만, 최대한 기분 좋게 전화 면접을 시작했다.


매니저: 안녕하세요? 저희 회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아세요? 저희 회사가 무엇을 하는지는 아세요?

크리스: 그럼요. 제가 대학생 시절 제일 많이 활용한 프로그램을 만든 회사죠!

매니저: 그러세요? 그럼 혹시 프로그램 이외의 저희가 하는 다른 업무에 대해서도 아세요?

크리스: 음.. 아니요, 프로그램 이외에는 잘 모르겠어요.

매니저: 번역일을 12년 동안 오래 하셨네요. 전공과는 조금 다른데 혹시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사실 회사와 포지션에는 관심 있었지만, 반드시 따낼 생각은 없었다. 일정한 수익이 없고, 그럴만한 잡이 없었던 과거에는 면접에서 물어보는 질문 하나하나가 부담스러웠고, 처절하고 절박하게 면접을 보았다. 하지만, 더 이상 수익이나 잡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은 자유롭다. 물어보는 질문에 대해서 상대방의 의도를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롭고, 포장하지 않고 솔직하게 웃으면서 대답할 수 있을 만큼 면접 과정을 즐기고 있었다.


크리스: 번역/통역을 통해서 서로의 언어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점이 너무 즐겁더라고요. 물론 지금까지 공부했던 전자/전기/컴퓨터 공학 전공 지식 또한 번역/통역에 충분히 잘 활용하고 있고요.

매니저: 그러시구나. 프리랜서를 오래 하셨는데, 인하우스도 가능하세요?

크리스: 인하우스요?..

매니저: 네, 저희는 지금 정규직으로 인하우스가 가능한 분을 찾고 있거든요.


아침 9시 회사에 출근해서 동료들과 함께 으쌰 으쌰 일하고 저녁 6시에 퇴근, 만약 업무가 남았으면 야근을 하거나 가끔 동료들과 회식을 하는 문화. 나 또한 이러한 문화가 익숙했지만, 어느 순간 경험해버린 원격 근무 문화에 빠져버린 나에게 이는 그저 나의 능력을 이 회사 안에 가둬야만 한다는 것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미국 대학원 시절, 랩실에서 연구 조교 (Research Assistant)로 일하면서 온라인 쇼핑몰, 풀 스택 개발자, 소셜 미디어/디지털 콘텐츠 마케터, UI/UX 디자이너, 해외 주식 & 암호 화폐 애널리스트 업무를 경험했다.


대학원 강의, 연구, 논문으로 따뜻한 밥 한 끼도 앉아서 제대로 먹을 시간도 없었지만, 바로 다음 학기 학비를 벌어야만 했다. 정말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운이 좋게 당시 프리랜서 시장이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던 미국에서 나의 원격 근무 커리어가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시간은 학교와 랩실에서 보내고, 기숙사에 돌아온 순간부터 노트북을 켜고 할 수 있는 원격 근무는 모두 했다. 채용 정보 (Job Description)에 나의 경험이 한 줄이라도 해당되면 모두 지원했다. 그렇게 텅텅 비어있던 기숙사 방 안에서 혼자 문어발 식으로 밤새 일을 했다.



매니저: 혹시, 연봉은 어느 정도 생각하세요?

크리스: 연봉은 회사 내규에 따르지 않나요?

매니저: 맞아요, 혹시 프리랜서 하시면서 월 수익은 어느 정도 되셨나요?

크리스: 월 수익은 xx 벌어요.

매니저: 네? 월 수익이요! 연봉 말고요.

크리스: 네, 월 수익 xx 요. 고객들이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도 많아서요.

매니저: 저 보다 훨씬 더 많이 버시는데요. 근데, 굳이 저희 회사에 올 이유가 있으세요?


이때부터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모르면 모른다고, 아니면 아니라고 너무 솔직하게 말한 것이 실수였을까. 프리랜서 수익이 얼마나 되느냐에 대한 질문에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면접에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신뢰 관계에 대해서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그리고 이는 그동안 그 수익을 벌기 위한 나의 처절한 노력과 희생은 그래도 무시된 채 그녀는 내가 말한 숫자에만 집중했다.


매니저: 프리랜서로 수익을 그만큼이나 버시면 저희 회사에 올 필요는 없을 텐데요. 나이도 아직 40대도 아니시고, 그저 경험하고 싶다고 회사에 들어오기는 참..

크리스: ...

매니저: 연봉도 그만큼 드릴 수도 없고,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회사에 나오셔서 출근해야 하는데, 하실 수 있겠어요? 이전과는 많이 다를 텐데요.

크리스: ... 그렇죠

매니저: 저희는 경험하고 싶으신 분보다는, 직무에 절박하신 분을 찾고 있거든요. 저도 수학과를 졸업하고, 바로 이 회사에 왔는데 생각과 현실은 많이 다르더라고요. 크리스님이 오시면 조금 힘들 수 있을 거 같아요.

크리스: 그렇군요.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이해한다는 식으로 둘러되고 전화를 끊었다. 침대에 누워 곰곰이 그녀가 한 말들을 생각하고 하나씩 하나씩 나의 이유를 말했다. "나이가 40대도 아니시고, " 나이가 중요하다면 채용 정보에 기입을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나이보다는 직무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경험보다는 절박하신 분을.." 그럼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직무에 절박해야만 하는 것인가? 물론 절박하면 더 열심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직무에 대한 절박함이 오히려 큰 부담과 번아웃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직무에 대한 흥미와 관심으로 시작해서 엄청난 전문가가 된 사람들도 많다.


"저도 수학과를 졸업하고,.. 많이 다르더라고요.." 그녀의 경험 또한 충분히 소중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경험이 나의 경험과 같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아무리 잘나도 다른 사람들과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들에게서도 배울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이 세상에 자신보다 잘나고 멋지고,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좁은 시각으로 상대방을 바라보고 조언이라 몇 마디 말해주는 것이 사실 불편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글로벌 회사라고 자신 있게 자랑했던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새 자신이 처한 현실을 수화기 넘어 다른 세상의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서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나는 그저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통화 마지막에 수화기 너머로 조그맣게 들리는 그녀의 한숨 소리는 내가 대학생 시절에 가지고 있었던 이 회사의 환상을 산산조각 깨뜨려 버렸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업무의 효율성과 생산성도 과거와는 많이 달라지고 있다. TV에서만 보았던 "라때는 말이야~" 경험을 실제로 해보니 굉장히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이 또한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경험을 통해서 한번 더 나의 생각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30대, 40대, 50대에 영어에 자신이 있다면 우리가 서야 하는 무대는 대한민국이 아닌, 글로벌 무대이다. 하지만, 글로벌 무대에 계속 서있고 싶다면 여러 가지 변수가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변수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사람이 바로 글로벌 인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Don't dwell on the past, be the one who chases the future.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를 쫓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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