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녀라고 쓰고 불효녀라고 읽는다
나는 유독 사람들의 감정을 살피고 눈치를 살폈다. 다 컸다, 철들었다는 말을 듣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나는 전형적인 K-1 장녀로 살아갔다. 감정은 억눌렀고 하고 싶은 말들을 삼켰다. 그렇게 11살이 되었다. 엄마가 아팠다. 암이라고 했다. 아무도 나에게 왜 그런 병이 오는 건지,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말해주지 않았다. 조금씩 수척해지는 엄마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학교에서 걸스카웃, 보이스카웃, 아람단 같은 활동의 창단식(?)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기억은 정확히 안 나는데, 특별한 학교로 선정이 된 것인지 요란스럽게도 전교생이 모두 '유니폼'을 입고 학교에 와야 했다. 그때 당시 내 기억에 유니폼은 6~7만 원을 훌쩍 넘었다.
당일 아침 체육복을 입고 학교길에 나섰다. 엄마가 '오늘 무슨 행사 있지 않느냐, 옷 챙겨 입어야 하는 거 아니냐'라고 물으셨다. 나는 엄마 눈을 쳐다보지 않고 신발을 구겨 신으며 아, 유니폼 없는 사람은 체육복 입고 와도 된댔어!라고 말하고 집을 나서 걸었다. 한참을 걸어도 당연히 체육복을 입은 아이는 나 밖에 없었다. 부끄러웠다. 하지만 아무리 부끄러워도 엄마에게 유니폼과 모자를 사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학교에 도착했다. 예상은 했지만 담임선생님은 내 예상보다 더 심하게 화를 내셨다. 무서웠다.
"깜빡했어요. 오늘이 행사인지. 유니폼은 집에 있는데 집에 어른들 안 계시고 열쇠 없어서 못 들어가요."
개미 만한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그렇게 행사는 시작되었고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부끄러웠다. 지나가는 선생님마다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혀를 차 댔다. 눈물이 목구멍에 꽉 차는 느낌이 들었다.
검진을 받으러 나선 엄마가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를 지나가셨다. 반짝거리는 유니폼을 입은 아이들 사이에 초록색 체육복을 입고 유별나게 서 있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는 그제야 '저 유별난 아이가 내 아이고, 아침에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길로 엄마는 병원이 아닌 팔달시장으로 달려갔다. 이 중에서 가장 좋은 걸로 달라고 하셨다. 그렇게 유니폼과 모자, 구두, 배지, 벨트까지 넘치도록 담긴 종이백을 들고 헐레벌떡 택시를 타고 학교로 오셨다. 엄마는 그렇게 곧장 담임선생님께 가셨다. 이내 누군가의 '담임선생님이 너 찾으셔'라는 말에 무서워 쿵쿵 대는 가슴으로 교실로 종종거리며 달려갔다.
한참 운듯한 엄마와 담임 선생님의 눈을 보니 상황 파악이 됐다. 괜히 무안해서 엄마에게 짜증을 냈다. '그걸 왜 사 왔어. 어차피 이제 다 끝나가는데.'라며. 담임 선생님이 엄마 손을 잡고 연신 미안하다고 하셨다. 자기가 잘 몰랐다고.
엄마는 아직도 그날 이야기가 나오면 우신다. 벌써 20년이 훌쩍 지난 일이지만, 나 또한 빨개진 엄마와 선생님의 눈들이 잊히지 않는다. 철이 든다는 것은 고단하고 서글픈 것이다. 모두가 갖추어진 환경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나 또한 그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러한 고단함과 서글픔이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나와 엄마의 사이를 조금 더 돈독하게 해주기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되었고 어느덧 엄마가 되어 엄마와 선생님께 거짓말을 했던 나이 또래의 딸을 키우고 있다.
나의 아이는 늦게 철들었으면 좋겠다. 내일 계획을 세워보자는 말에 지금처럼 '시리얼 80g 먹기' 같은 아이답고 엉뚱한 대답을 오래오래 했으면 좋겠다. 내가 엄마가 되어 보니 엄마를 배려해서 한 거짓말이 엄마를 10배 20배 더 아프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때로는 솔직하게 감정을 나누고 '피해'를 끼치고 '어리광'을 부려도 괜찮다. 내 아이니까, 다 괜찮다.
오늘은 저의 11살 때의 기억을 한 번 돌아봤어요. 태어날 때 우리는 우리의 환경을 선택하지 못해요. 어린 우리는 그 환경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없고요. 누구나 불공평한 세상에 태어나 특정 요소를 남들보다 덜 가진 채 살아가요. 그게 '부' 일수도, '관심' 일수도, '사랑'일 수도 있죠. 누구나 나름의 걱정과 불안을 가지고 살아요.
불공평한 지금의 상황을 탓하거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어른이 된 우리는 환경을 개선시킬,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오늘 하루도 잘 살아가고 있는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힘이 있거든요. 우리는 그렇게 자신의 결핍과 상처를 스스로에게 하는 따뜻한 말로 메꿔나갈 수 있어요. 지금까지 살아온,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갈 스스로를 장하다, 잘했다 칭찬해 주세요.
'오늘도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살아 내느라 고생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