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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코치 Mar 31. 2017

1. 난임의 추억

지나고 나면 고통은 추억이 된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진료실 앞 소파에 겨우 앉아 남편에게 전화를 건다. 초음파 결과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그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줄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역시나 그는 감격했다. 며칠 전 임신 테스터기에 리본을 달아 긴 편지와 함께 전했을 때도 "확실해질 때까지 좀 더 기다리자"며 신중하게 답하던 그의 목소리가 전화가 너머로 떨린다.


“여보, 임신이래”

“(……………) 자기가 수고 많았어. 고마워. 사랑해”


전화를 끊고, 우리는 사전에 역할 분담한 대로 나는 시댁에 그는 친정에 전화를 걸었다. 시험관 시술을 했던 것도,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나왔던 것도 전혀 몰랐던 양가 부모님은 전화기 너머로 뜀박질하는 게 느껴질 정도로 기뻐하셨다. 전화를 끊고 나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우리에게 드디어 아이가 생겼구나. 2년을 꼬박 기다렸던 아이다. 그간의 마음고생이 스쳐 지나가며 눈물이 흘렀다. 병원에 동행해준 시누의 어깨에 기대어 울었다.

2년간의 마음고생


왜 나만 아이가 안 생기는 거야? 
내가 뭔 잘못을 했다고! 
영영 안 생기면 어쩌지?
내가 그간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나는 이렇게 아이가 간절한데, 어떻게 저이는 저리 태평할 수가 있지?


난임으로 고생하는 동안 나를 괴롭혔던 생각들이다. 난임 자체보다도 이 생각들이 나를 괴롭혔다. 불안은 임신 준비 9개월 정도부터 시작되었다. 난임병원은 임신 시도 1년 이후 가도록 되어 있지만, 난 불안한 마음에 주변을 수소문해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서 내준 숙제를 꼬박꼬박 하면서 동시에 불임카페에 가입해 비법을 찾았다. 임신에 좋다는 운동, 현미채식, 명상 등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런 노력에도 임신이 되지 않자 외롭고 괴로웠다. 어느 날엔가는 이 괴로운 마음 알아주는 이 아무도 없어서 '여성의 전화'를 찾기도 했다. 또 어느 날엔가는 두 아이 육아로 소식이 뜸했던 옛 절친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했던 적도 있었다. "야, 없을 때 즐겨. 생기면 너 암것도 못해!"라는 친구의 애정 어린 핀잔에 깨갱했지만.

매달 한 번씩 'Fail'이라는 성적표를 받아 들 때마다 나를 잠식했던 우울함 그리고 절망감. 나는 점차 일을 줄였고 외출을 줄였고 관계를 끊었고 마음의 문을 닫았다. 누군가는 "뭘 그렇게까지 속상해하냐"라고 타박할지도 모르겠다. 그래, 나도네가 그렇게까지 속상해할 줄 몰랐다. 일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던 내가, 계획 세우고 공부하는 거 좋아하던 내가, 하루 종일 불임카페만 들락거리며 임신정보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사람 일이란, 겪어 보기 전엔 단정 지을 일이 아니다.


돌아보면 그렇게 속상해한 것 때문에 임신이 더 안되었을 것이다. 신체적인 이상이 없다면, 난임의 가장 큰 원인은 ‘스트레스’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맘 편히 가져”라는 말조차 스트레스였다. ‘네가 뭘 안다고 맘 편히 가지래?’라는 까칠한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래도 연이은 인공수정의 실패에 나는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렵사리 시험관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스트레스를 덜 받기 위해 대신 집중할 것을 찾았다. 책장을 정리하고, 옷장을 정리하고 산책을 나갔다. 그리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흘러내리는 눈물 그리고 축복받은 임신기간

그런 마음고생 끝에 생긴 아기이니 초음파 기계 너머로 전해오는 "쿵쾅쿵쾅" 빠른 심장소리에 어찌 내 가슴도 요동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의사로부터"임신입니다. 축하드립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찌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있었을까? 긴 터널을 드디어 빠져나왔다는 안도감, 건강하게 자리 잡아준 아기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그간 마음고생한 나에 대한 연민의 마음...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섞인 울음이었다.

임신소식은 소수에게만 알렸다. 점 같은 걸 믿지는 않았지만, 왠지 부정 탈까 봐 가까운 사람들하고만 알고 지내고 싶었다. 조심해야 하는 12주까지는 꼬박 집에 누워서 지냈다. 졸리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그렇게 몸이 이끄는 대로. 임신 기간은 축복이었다. 만약 쉽게 임신이 되었더라면 나는 원래 내 습관대로 일하며 바삐 지냈을 것이다. 귀하게 생긴 아기는 내 생활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나는 아이만 생각했고, 아이와 함께 지낼 날들을 상상했고, 아이와의 생활을 준비했다.


“어떤 큰일을 겪는다는 것, 그것이 무엇이고 얼마나 흔치 않은 일이건 간에 그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다”

-       빅터 프랑클 (정신의학자, 로고테라피의 창시자)


내 마음이 편안한 게 가장 좋은 태교라는 생각에 그동안 일하느라 못했던, 그러나 늘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했다. 바느질, 숲 산책, 도서관에서 책 읽기, 한지공예, 체조와 명상 등등 아이에게 일정한 리듬을 만들어주고 싶어, 태교 계획표라는 것도 만들 지경이었다. 세워놓고 지키지 못한 적이 훨씬 많았지만, 그만큼 아이와 함께 할 날들에 대한 기대가 컸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싶었다.


태동을 처음 느꼈던 순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20주쯤 되었을 때였다. 주변에선 이쯤이면 태동을 이미 다 듣는다는데, 난 왜 아직 소식이 없지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참이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임신한 시누네에 놀러 가서 뱃속 아가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교사로 일하는 아가씨의 낭랑한 하이톤에 뱃속 아기가 신이 났었나 보다. 갑자기 뻥 하고 신호를 보냈다.


어머.... 세상에..
너 거기 있구나.
그렇게 거기에 분명히 있음을
이 엄마에게 알려주는구나.
고맙다... 아가야..


감동의 눈물이 주르륵. 누가 보면 참 주책일 테다. 그래도 병원 기준 노산의 범위에 들랑 말랑 하는 에미 입장에선 아기의 몸짓 하나도 뭉클했다. 아기가 커갈수록 '내가 엄마다'라는 자각은 점점 더 분명해져 갔다.'엄마로서 이럴 때 어떻게 하지?'라고 묻는 일이 잦아졌고 '다른 엄마들은 어떻게 하지?'라고 궁금증이 커졌고, 그만큼 '나'로서의 생활은 줄어들었다. 


이때만 해도 '육아는 전쟁이다'라는 선배 엄마들의 말에 ‘에이.. 설마 그렇겠어?’라는 의심과 ‘다른 사람은 다 그래도 난 안 그럴 자신 있어’라는 오만으로 반응했다. "뱃속에 있을 때가 제일 좋은 때"라는 말에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출산 이후 폭풍처럼 몰아칠 육아에 대한 예고였을까? 유난히 더웠던 임신 막달, 나는 호흡곤란을 경험했고, '호흡곤란이 또 찾아올까 봐' 예기불안에 시달렸다. 무서워서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했고 지하철도 피해야 했다. 평생 되풀이될까 봐 두려웠다. ‘이럴 때 자살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결론적으로 그 모든 걱정은 기우였지만, 임신이 그리 녹록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톡톡히 경험한 순간이었다. 


by 지혜코치


2년간 기다린 아이, 내 삶을 점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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