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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코치 Mar 31. 2017

2. 뜻밖의 출산

모든 출산에는 자기만의 길이 있다.

12주가 지나 안정기에 접어들자 일반 산부인과로 옮겼다. 조그만 진료실에서, 의사와 눈 한번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후다닥 끝나는 진료가 시작되었다.


“다음 진료 때 기형아 검사하실 거예요.”

“네? 그거 꼭 해야 하나요?”

“노산이시라 위험하세요.”

“저 아직 만 35살 아닌데요.”


원래도 병원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의료진의 일방적인 진료가 거슬렸다. 그들에게 난 스스로 선택할 권리나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걸까?


“입체초음파 예약 잡아드릴게요.”

“네? 그거 안 하고 싶은데요?”

“다 하시는데요.”

“………………………..”


출산할 때도 이런 식이라면 곤란했다. 그들의 무성의하고 몰감정적인 의료관행 속에서 출산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와 아이에게 최선의 출산이 어떤 것일지 찾고 싶었다. 그때 떠오른 것이 ‘수중분만’. 결혼을 하기도 한참 전에 유명한 뮤지컬배우의 수중분만이 방송된 적이 있었다. 물 속이라는 낯선 장소에서 출산을 하는 그녀가, 그럼에도 환희에 찬 듯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너무 신기했었다. 지극히 사적인 출산의 순간을 전국에 방송으로 내보낸 그녀의 용기가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그때 어렴풋이 다짐했던 것 같다. ‘나도 아이가 스스로 밀고 나올 수 있게 자연스러운 환경을 만들어 줘야지’.


십여 년이 흘렀다. 우리의 출산 문화는 여전히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이다. 그나마 지금은 자연분만이 산모와 아이 모두에게 좋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지만, 30~40년 전엔 제왕절개가 유행하던 시절도 있었다. (북한에선 여전히 제왕절개가 귀족수술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점지받은 날짜에 출산하거나, 위생적인 병원에서 전문가의 집도 하에 진행되니 안전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제왕절개에 비하면 자연분만이 더 자연스럽긴 하지만, 여전히 출산의 주도권은 의사에게 있다. 산모는 진통이 시작되어 병원에 들어가면 ‘수술 가능성’에 대비하여 정맥주사를 꽂게 되어있고, 일명 굴욕 3종 세트라고 하는 내진, 관장, 제모를 해야 한다. 침대에 누워서 대기해야 하며, 가족실이 아닐 경우 혼자 있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산모는 환자 취급을 당하고, 선택권을 박탈당한다.


자녀 넷을 집에서 주인집 아줌마의 도움만 받으며 낳으신 친정 엄마를 생각하면, 시대가 얼마나 변했는지 실감이 난다. 지금은 ‘병원’이 아닌 곳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위험한 짓’으로 간주되니까. 조산원에서 아기를 낳다가 위험을 겪었다거나, 갑작스러운 진통에 택시 타고 병원에 가다가 차 안에서 낳았다는 아찔한 무용담들에, 초산모들은 잔쯕 겁에 질려 안전한 선택을 한다. 그래서 가정분만, 조산원 분만은 소수의 특이한 선택일 뿐이다.


출산은 과학이 아니다. 해부학도 아니다. 또한 의사나 조산사, 간호사의 일도 아니며, 누군가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출산은 부모와 아기의 것이다 

-    메리 몽간, ‘평화로운 출산– 히프노버딩’


자연스러우면서도 안전한 출산, 그것이 불가능한 것일까? 그 질문을 품고 있던 가운데 ‘자연출산’을 하는 병원을 알게 되었다. 자연출산은 자연분만과 달리, 산모를 치료가 필요한 환자가 아닌 출산의 주인공으로 보며, 무통주사나 유도분만, 굴욕 3종 세트 등의 의료 개입을 최소화하고, 산모가 편한 방식으로, 아이의 속도대로 진통과 출산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기다리는 출산 방식을 말한다. 의사가 함께 하기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수도 있지만, 의사는 보조자 역할을 할 뿐 출산의 주도권을 산모가 쥐고 있다니. 이거야말로 내가 찾던 출산 형태가 아니던가?


나는 ‘자연출산’ 카페에 가입했다. 사례들을 읽어 내려갔다. 나와 같은 뜻을 가진 엄마들이 많았다. 기뻤다. 내가 똘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안심이 되던가? 그때 마침 TV에서 ‘자연출산’에 대한 다큐가 방송되었다. 방송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카페가입자가 순식간에 수천 명이 늘었다. 팬들이 늘어나자 동시에 나의 반감도 늘어났다. 누구나가 다 좇아가는 대열에 끼고 싶진 않았다. 마침 병원비도 너무 비싸다 느끼던 참이었다.


다른 대안을 찾아보았다. 시험관으로 가진 아기이니 조산원은 너무 리스크가 크게 느껴졌다. 산모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면서, 편안한 분위기를 제공하는 병원을 찾아야 했다. 조사 끝에 집에서 20여 킬로 떨어진 곳에 아담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에 친절한 르봐이예 분만 전문병원을 찾아냈다. 르봐이예 분만은 5가지 원칙 (어두운 조명, 침묵과 조용한 대화, 출산 직후 엄마와의 신체접촉, 맥박이 멈출 때까지 탯줄 자르지 않기, 탯줄 자른 후 양수와 같은 온도의 물속에 아기를 놓아두기)을 가지고 아기의 예민한 감각을 보호하는 분만법이다. 나는 자연출산 카페에서 배운 대로 출산 계획서를 작성했다. 내가 어떻게 아이를 낳고 싶은지 나의 마음을 담은 세 쪽짜리 문서였다.


아기는 우리를 감지하는 데 있어서 기적에 가까운 정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기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느낍니다.


-    프레드릭 르봐이예 ‘폭력 없는 탄생’


토요일 남편의 손을 잡고 들뜬 마음으로 찾은 병원에서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자연출산이라고 다 좋은 게 아니에요. 의료적인 위험도 간과할 수 없어요. 보통 산모와 아기의 생명을 50:50으로 생각하는데, 산모의 아기는 시험관으로 가진 valuable child이기 때문에,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기면 아기를 더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의사는 valuable child라는 단어에 유난히 힘주어 말했다. 그때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이 의사는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바로 수술로 돌입할 거라는 것을 말이다. 그때 나는 그저 내 아기를 소중히 여겨주니 고맙다는 마음밖에 들질 않았다. 


병원 순례, 그리고 막달 검사를 거쳐 무사히 예정일이 되었다. 여느 초산에서 그렇듯 아기는 기미조차 없었다. 나는 자연출산 카페에서 선배 엄마들이 했던 것처럼, 그때부터 병원을 가지 않았다. ‘유도분만’ 이야기를 꺼낼 것이 예상되어서였다. 아이가 나올 때를 기다려 주고 싶었다. 기다림은 생각보다 길었다. 주변에서 ‘아직 소식 없냐’ 묻는 이들이 많아졌다. 양가 부모님도 이제 더 이상 부담스러울까 봐 전화를 하지 않으시는 눈치였다. 나는 부지런히 걸었고 걸레질을 했고, 아기에게 ‘이제 만나자’라고 말을 걸었다.


예정일로부터 11일이 지난날 새벽 2시. 아랫배가 싸한 느낌에 잠에서 깼다. 묵직하게 누르는 느낌도 들었다. 다시 잠은 오지 않았다. 긴 하루가 될지 모르기에 남편을 깨우지 않고 거실을 거닐었다. 한참 전에 싸 둔 가방도 다시 열어서 확인해 보고, 집 구석구석을 정돈했다. 오전엔 진통이 사그라들더니 낮 4시쯤 다시 신호가 왔다. 나는 조퇴한 남편 손을 잡고 아파트와 마트 등을 걸었다. 12층 아파트 계단도 여러 번 오르락거렸다. 순식간에 진통이 휘몰고 지나갈 땐 기둥을 잡고 잠시 숨을 고르기도 했다. 그래도 여전히 참을 만했는데 저녁식사 후 진통이 휘몰아쳤다. 갑작스런 강한 진통에 겁이 덜컥 났다. 차로 30분 정도를 가야 하는데, 가는 길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택시에서 애 낳은 엄마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면 어쩌나.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남편은 119를 불렀다.


병원에 도착한 게 8시경.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나는 진통에 열중했다. 진통이 찾아오면 나는 몸이 내는 소리를 뿜어냈고, 진통이 잠잠해지면 마사지해준 남편에게 "고마워 여보", 팔을 잡아준 간호사에게 "아로마 오일을 다 쓴 것 같아요. 어쩌지요?"라고 평소의 톤을 되찾았다. 포효하는 어미에서, 코칭을 하고 글을 쓰는 교양인으로 수십 번을 왔다 갔다 했다. 11시경 8cm에 돌입했다. 좋은 진행이다. 스스로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거기서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퇴근했던 원장님이 1시에 찾아왔다. “8cm에서 멈춘 지 2시간입니다. 수술을 고려해 보아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몇 시간이나 되었다고 수술이에요!


하지만 남편은 이미 마음이 넘어가버렸다.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고, 의사가 그 마음을 잘 건드려 놓은 것이다. 수술로 마음이 기운 남편 앞에서 기다림을 계속 요구하는 것은 무리였다. 야간이라 간호사는 한 명. 그나마도 경험이 많지 않은지 이렇게 저렇게 해보라는 요령이 없었다. 비숙련 간호사와, 수술을 권하는 의사, 수술로 마음이 기운 남편. 세 명이 내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짐볼도 없고, 걸을 공간도 마땅치 않고, 아기가 더 잘 나오는 자세나 호흡법도 알지 못했다. 그런 나에게 어떤 선택이 있었을까. 처음 출산하는 초짜 엄마일 뿐인데. 


결국 나는 수술을 택했다. 새벽 3시, 준비된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나는 간호사 손을 붙잡고 말했다. “수술 중에 목소리를 낮춰 주세요. 조명은 낮출 수가 없나요? 아기 꺼내시고 나면 꼭 제 품에 바로 안겨 주세요.” 아기와의 첫 만남을 똑똑히 기억하고 싶어 하반신 마취를 선택한 나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자연출산, 르봐이예분만, 심지어 자연분만도 못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아기가 세상에 나오는 첫 순간이 최대한 평화롭고 자연스럽길 바랬다. 돌아오는 시선은 차가웠다. “수술할 땐 그렇게 못해요.” 그래도 아기는 수술실에서 바로 내 품에 안겼다. 후처치를 하는 동안 남편이 데려가 수술실 밖에서 아기를 품에 안고 노래를 불러주었다고 했다. 나는 그동안 정신없이 잠에 빠져 들었다.


by 지혜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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