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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코치 Mar 31. 2017

3. 엄마 신고식

무지한 초보 부모가 실수에서 배우는 지혜

정신을 차려 보니 따뜻한 온돌방으로 옮겨져 있었다. 마취가 덜 풀려 몸은 꼼짝하지 못 했지만 두리번거리며 ‘아기’부터 찾았다. 남편이 신생아실에서 아기를 데려왔다. 아기를 안아 보았다. 수술을 하지 않았다면 아기에게 ‘엄마 다리 사이로 머리 비집고 세상으로 나오기’라는 인생 최초의 도전을 선물해 줄 수 있었을 텐데 미안하기도 했고, 르봐이예 분만 의식 중의 하나인 따뜻한 물에 담가 놓고 ‘편지 낭독’을 못한 것도 아쉬웠다. 그래 편지! 지금이라도 읽어주자! 했지만 호르몬의 영향인지 눈물이 앞을 가려 읽지를 못했다. 대신 남편이 건조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들으면서 나는 아기의 몸을 더듬었다.


네가 이렇게 생겼구나.
이게 니 눈이구나.
엄마가 정말 많이 기다렸어.
만나서 반가워.
이렇게 건강하게 나와줘서 너무 고마워.


눈물은 이내 통곡으로 변해갔다. 남편은 아마도 어리둥절했겠지만, 나는 2년간의 마음고생 끝에 얻은 이 아기가 내 품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기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아기의 작디작은 손을 만지고 있노라면, 그간의 고통이 모조리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제왕절개는 계속 후회스러웠다.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5일 먼저 남자아이를 자연 분만한 시누이는 ‘혹시라도 수술했다고 속상해하지 말아라’라고 위로했고, 나처럼 첫째를 병원의 권고로 불필요한 수술을 했던 친정 언니는 거동을 못하고 누워 있는 나를 보곤 짠한 마음에 나가서 아기 내복을 사 가지고 왔다. 


수술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나는 아기와 내내 붙어 있었다. 수술 여파로 아직 일어나 앉지도 못하는 몸이고 아직 항생제를 먹고 있었지만 겨우겨우 모유수유를 시작했고, 수유 텀이나 소변 횟수 등을 종이에 깨알같이 적어 두었다. 병원에서의 1주일, 조리원에서의 2주일을 나는 정신도 없고, 잠도 계속 설쳤지만 어디서 힘이 솟았는지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아기에게 집중했다. 


여느 엄마에게나 그렇듯 모유수유는 큰 고민이었다. 출산 다음날부터 바로 젖을 물리기 시작했는데, 아기가 가열차게 빨길래 나는 젖이 콸콸 쏟아지는 줄 알았다. 혹시나 해서 손가락을 물려보니, 아주 거센 힘으로 무려 30분을 한결같이 빠는 게 아닌가? ‘젖 먹던 힘’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젖은 잘 안 나왔다. 혼합수유를 하면 젖이 줄어든다는 말, 아기가 젖병 젖꼭지에 길들여지면 엄마젖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말, 엄마젖은 원래 3~4일 지나서야 나오고 아기는 그 사이 굶어도 원래 가지고 있던 영양분이 있어서 괜찮다는 말들을 듣기는 했지만, 막상 배고파서 우는 아기를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다디단 분유를 먹이는 것에 거부감이 컸지만, 그래도 고민 끝에 아기에게 혼합수유를 했다. 


조리원에서 아기는 뱃속에서처럼 순했다. 자주 울긴 했지만, 그리고 그 이유를 초보엄 마인 나는 대체로 구분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두 눈으로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와 눈을 마주치는 것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뭉클함을 주었다. 조각 잠이라도 잠든 아기 옆에 누워 잠드는 것은 묘한 평화로움을 주었다. 


그렇게 순했던 아기가, 조리원을 나와 돌변했다. 밤새 울었고 새벽녘에야 겨우 품에서 잠이 들었다. 낮에도 잠깐씩 잘 뿐 아이는 계속 울었다. 친정엄마와 남편, 나 셋이서 돌아가면서 아이를 보는데도 셋 다 나가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미칠 것 같았다. 왜 이러지? 뭐가 문제지? 내가 뭘 잘못하나? 육아가 원래 이렇게 힘든 것일까? 내 아이가 너무 예민한 아이인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에도 아이가 그렇게 우는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그 옆에서 친정 엄마는 "애가 밤낮이 바뀌었다", "달래주지 마라", "누굴 닮아 이렇게 예민하냐"라고 하시며 내 근심에 부채질을 했다. 


귀청이 떨어져라 우는 아이 달래느라 잠 못 이루길 10여 일. 우는 아이를 재우기 위해 안 해본 것이 없었다. 온습도 맞추기, 귀에 쉬 소리 들려주기, 두세 시간이고 안아서 서 있기. 자장가 불러주기.. 끝이 없었다. 우리는 녹초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이가 이렇게 돌변한다는 게 납득이 가질 않았다. 이건 뭔가 문제가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환경이 바뀐 탓도 아니고, 아이가 예민한 아이여서도 아니고, 어딘가 아파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몇 시간을 울다 잠든 아이를 배에 올려둔 채로 검색을 시작했다. ‘영아산통’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드문 경우라긴 하지만, 내 아이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래 날 밝으면 병원을 가보자’ 하고 마음을 정리했다. 의사에게 아이가 어떻게 우는지 보여주려고 동영상도 찍어 놓았다. 그리고 그 날 새벽 아이는 열이 났다.


열이 오른 아이를 데리고 가까운 소아과를 찾았다. 소아과는 북적였다. 팔뚝만 한 신생아를 안고 1시간을 넘게 기다린 끝에  만난 의사는 "생후 6개월 미만의 아이는 열나면 무조건 큰 병원 가야 합니다."라며 아기는 보지도 않고 소견서를 써주었다. 겁이 덜컥 났다. 뭔가 큰 문제가 생긴 거구나. 택시를 잡아타고 인근 대학 병원을 갔다. 여기선 더 무서웠다. "입원 절차 밟으시고요. 오후에 바로 검사 들어갑니다. 뇌척수 검사도 하셔야 해요." 검사도 않고 바로 입원이라니, 게다가 뇌척수 검사라니.. 판단이 서질 않았다. 겁만 났다. 친정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검사 때문에 애가 더 힘들어. 외래 해주는 데 찾아봐. 대학병원은 퇴원도 잘 안 시켜줘." 우는 아이를 달래 가며 전화를 돌렸다. 다행히 있단다. 대신 하루를 더 기다려야 했다.


온갖 불길한 상상들로 가득한 하루가 지나고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여기저기를 살펴보더니 소변검사를 의뢰했고, 몇 시간 후 아이는 요로감염으로 밝혀졌다. 당장 입원을 했다. 원인을 알았고 치료를 하면 된다니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채혈을 위해 손가락 두 마디 만한 아이 발에 바늘을 찔러대기를 30분,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밤 11시, 여러 검사 결과에 대한 주치의의 브리핑에 나는 가슴이 무너졌다. 


"어머님, 아기 염증 수치가 너무 높아요. 아기가 참을성이 진짜 많은 아기인가 봐요. 생후 6개월 안엔 엄마한테 받은 면역력이 있어서 웬만해선 안 아픈데, 지금 요로감염에 걸렸다는 건 선천적 기형의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에요. 일단 항생제 치료하면서 내일모레 몇 가지 검사를 더 할게요."


치료를 받는 중에도 나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내 몸에도 무리가 왔다. 열이 나고 전신통증이 와서 진료를 받으니 편도선염과 후두염이란다. 아이 옆에 있어봤자 폐만 될 거라고 친정엄마로부터 강제 휴식 명령을 받고 집으로 왔다. 정신없이 쓰러져 자고 일어나니 새벽 다섯 시. 아이가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대여섯 시간을 쉰 수유 때문에 가슴은 팅팅 불어 있었다. 택시를 잡아 타고 병원으로 부리나케 향했다. 이제 좀 살만한지 곤히 잠든 아이 곁에 눕고서야 마음의 안정이 찾아왔다. 이후로도 아이는 요로의 선천적 기형 가능성을 체크하기 위해 두세 번 더 검진을 받았다. 그리고 돌이 지나서야 기형이 아님을 확진받았고,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때 소아과 의사에게 보여주려고 찍었던 동영상을 보면 아이의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져 가슴이 미어진다. 유일한 표현 수단인 울음을 동원해온 몸으로 울어재끼는데 ‘왜 안 자냐’고, ‘제발 좀 자’라고 그렇게 애원을 했으니 아이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루 한두 번의 소변 같은 확실한 단서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지한 초보 부모였다. 출산 한 달 만에 엄마로서의 신고식을 톡톡히 치렀다. 그 덕에 나는 아이의 신호에 보다 민감해졌다.


by 지혜코치


거대한 기계 속에서 이름 모를 검사를 받는 30일된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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