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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코치 Mar 31. 2017

6. 사라진 '나'

초보 엄마 1년 차에 대한 회고

돌잔치가 끝났다. 소박하게 한다고 직계가족만 초대했건만 그래도 준비할 건 많았다. 장소 예약, 동영상 제작, 드레스 대여, 돌상 세팅까지 규모가 작을 뿐 할 건 다 하게 되었다. 나중에라도 후회하지 않으려고, 아니면 ‘내가 이만큼 정성을 쏟았다’며 아이와 남편에게 보여주고 싶은 심리였던 걸까. 나는 인터넷을 뒤져 수박 카빙하는 방법까지 찾아내 꽤나 열심히 돌잔치를 준비했다. 업체에 연락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사진들을 고르고, 비교 견적을 내보고 하다 보니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씻기고의 무한반복에서 벗어나 간만에 일하는 느낌이 들었다. 무사히 치르고 나서는 성취감마저 들 정도였다.


돌잔치가 끝나고 한숨 돌린 나는 마음 맞는 엄마들과의 모임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갔다. 집으로 놀러 가거나, 날이 좋을 때는 공원으로 나들이도 함께 갔다. 강사님을 섭외해서 함께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에 나갔다. 비슷한 고민, 비슷한 가치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과의 만남이 이렇게 활력소가 될 줄이야. 나는 뚜벅이 신세였지만 간식과 기저귀 바리바리 챙겨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녔다. 


돌 즈음의 아기를 키우는 엄마들을 만나보니, 내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가 좀 더 객관적으로 보였다. 초보 엄마 1년차, 그들은 이런 공통점이 있다.



1. 피곤하고 분주하다.
- 토막잠, 그리고 부실한 식사로 눈은 퀭하고 머리는 멍하다. 
- 혹시라도 아이가 다칠까, 아플까 아이를 쫓느라 눈이 쉴 새 없이 바쁘다.
- 잠든 아이 옆에서 육아용품 후기 뒤지느라, 육아카페 순례하느라 눈이 빠질 듯 아프다.
- 하지만 잠 자기 억울해서 버티다가 아침에 아이 소리에 깬다.
- 종일 바쁘고 정신없는데, 해놓은 건 별로 없는 것 같다.

2. 외롭다.
- 아이 외에 대화 상대가 별로 없다.
- 남편은 늦게 들어오고, 그나마 피곤한 상태로 들어온다.
- 아기 키우는 친구는 멀리 살고, 아기 안 키우는 친구는 대화가 안 된다.
- 혼자 드라마를 보며, TV와 대화하는 능력을 장착하게 된다.
- 연말, 생일, 결혼기념일은 더 외롭다.

3. 실수 연발이다.
- 출산 전에 책으로 배운 지식들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 인터넷에서 찾은 정보들은 서로 상충되고 ‘결국 엄마의 선택’이라고 한다.
- 학교에서 쌓은 전공지식, 직장에서 쌓은 기술은 당연히 쓸데가 없다.
- 과거에 무슨 일을 했건, 얼마나 똑똑했건 관계없이 뭐든 어설프고, 뭐든 자신이 없다. 
- 그리고 그러면서 배워간다.

4. 머리도 입도 아이로 꽉 차 있다.
- 아이 재우고 나서 아이 사진 보고 있는다.
- 모든 이야기가 아이 이야기로 흘러간다.
- 아기 똥이 오늘 아침 왜 초록색이었는가가 뜨거운 토론거리가 된다.
- 어떻게 더 먹일지, 밤에 어떻게 더 길게 재울지가 지상 최대의 관심사다.
- 아무도 관심 없는 아기의 작은 성장을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거린다.

5. 지적능력이 퇴화된다.
- 정확한 단어가 생각이 안 난다. 
- ‘쉬했쪄요’같은 baby talk가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 신문, 책, 잡지와 거리가 멀어진다.
- 당연히 시사, 뉴스, 현안, 이딴 거 하나도 모른다.

6. 감정의 널뛰기를 한다.
- 아이 뒤집기에 물개 박수를 쳤다가,
- 아이 피부 트러블에 세상 모든 근심을 짊어졌다가
- 갑자기 엄마가 된 걸 후회하기도 한다.
- 아이 미소에 행복했다가, 나만 모성 부족한 ‘나쁜 엄마’인 것 같아 작아진다.

7. 갈 곳과 할 것이 제한된다.
- 화려한 홍대 거리, 왁자지껄한 대학로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 어딜 가든 수유실과 기저귀 교환대 사전 확인은 필수다.
- 취미, 취향, 자기계발이 웬 말이냐. 생리현상도 제때제때 해결 못한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제니퍼 시니어는 엄마의 생활을 이렇게 묘사했다.


장기간 노동, 수면부족, 만성피로, 바깥출입 및 사회적 접촉 제한, 직장생활에 따른 충족감 및 소득 포기, 늘어난 빨랫감과 다림질감, 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한다는 죄책감, 낮밤 없이 휴일 없이 아이를 돌봐야 하는, 엉망으로 변화하는 집안 꼴, 늘어나는 몸무게

- 제니퍼 시니어, 부모로 산다는 것 中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미국 엄마들이 우리와 똑같은 상황을 겪는다는 게 기뻐할 일인지 슬퍼할 일인지 모르겠다. 이것뿐이랴, 남편과의 관계, 친구관계, 관심사, 인생관 모두 변한다. 아이를 낳은 이유, 엄마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삶을 통째로 바꿔놓는다는 것이다. 말 한마디 못하는 이 작고 붉은 생명체는 엄마의 세상을 온통 흔들어 놓고, 출산을 선택했을 뿐인데 여성의 인생은 예측도 준비도 차분한 대처도 어려운 한편의 리얼 버라이어티쇼로 변신한다. 


초보 엄마로서 독박 육아하는 1년 동안 나는 아기만 보고 지냈다. ‘요로감염’ 사건 이후로 긴장이 바짝 들어가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육아도 살림도 온통 낯설었다. 한 번은 아기 겨드랑이가 짓물렀길래 병원에 갔더니, “제대로 안 씻겨서 그래요”라는 충격적인 진단을 받았다. 아기가 너무 작아서 목욕시키는 게 조심스러워 살살 하다 보니, 미처 팔을 올려 겨드랑이를 뽀독뽀독 씻기지는 못한 것이다.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리던지. 임신 중에 신생아 목욕법을 배운 것은 평생 비밀로 붙이고 싶을 정도였다. 


실수 연발 좌충우돌 외롭고 힘든 독박 육아 1년을 버티게 해 준 것은 아기에게서 얻는 기쁨과 충만함이었다. 아이의 손을 만지고 있으면 마음이 절로 평화로워지고, 아이의 오동통한 발을 보고 있노라면 심장이 녹아내릴 것 같다. 아이의 말랑한 촉감은 내 가슴도 말랑하게 했다. 아기가 잘 때면 숨죽이고 쳐다보며 이 사랑스러운 천사가 정말 내 몸에서 나온 게 맞는지 눈을 비비게 되었다. 나의 웃음에 1초도 안되어 따라 웃는 아기를 보면, 가슴속에서 행복이 절로 피어났다. 완벽한 상호교감이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났을 때 ‘나’는사라져 있었다. 친구도 일도, 나만의 시간과 취미도, 몽땅 없어졌다. 뭔가 뜨개질 같은 거라도 시작해볼까? 아니면 책을 읽을까? 블로그를 다시 시작해볼까? 그러다 문득 나는 자문했다.


지금 행복하니?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한번 던져진 질문은 답을 찾을 때까지 멈춰지지 않는다. 소중한 아이가 행복하고 아이만큼 소중한 나도 행복한 삶. 그것이 가능할까? 나를 희생하지 않고서 아이도 나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능할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by 지혜코치


                                                                  

잠들어 있는 아기 천사
















부끄러워서 조그맣게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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