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애, 63세, 신라 한복
연세랑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나이는 63이고, 이름은 박영애.
지금 만들고 계신 건 뭐예요?
요즘 사람들이 고름을 잘 못 매요. 더구나 외국에 있는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지. 고름 매기 쉽게 만들어주면 외국 사람들이 간단하게 맬 수 있어서, 고름 작업을 하고 있는 거죠.
'신라 한복'이란 상호명은 어떻게 지으셨어요?
절에 가서 스님한테 상호를 좀 지어달라고 해서 지었지.(웃음)
한복을 만들게 되신 계기가 어떻게 되세요?
나는 어려서는 엄청 불만이 많았어요. 나까지 형제가 6남매인데, 큰 딸은 큰 딸이라서 학교 보내야 되고 아들들은 아들이라 보내야 되고 내가 딱 중간이에요. 내 밑으로 여동생 남동생 있고 위로 오빠 있고 언니 둘 있고. 시골에 살 때 모 심을 때는 학교에 빠져야 되는 거야 나는. 크면서 진학을 못 하게 되는 거야. 자식이 많아서 다 제대로 못 가르친다 이거야. 그래서 나는 형제 중에서도 희생을 했어요. 엄마가 일을 시키면 그것도 싫고, 학교를 못 가고 일을 해야 된다는 게 가슴에 응어리가 질 정도로 힘들었죠. 내가 4대째예요. 딸이 물려받고, 딸이 물려받고 또 물려받은 거죠. 친정엄마가 한복을 했어요. 처음에는 한복을 만드는 게 흥미가 안 생기고 싫었지. 나는 바느질해서는 안 먹고 산다고 하고 일찌감치 서울로 올라가서 직장을 다녔는데 결혼을 하고 보니까 우리 남편이 벌어다 주는 것 가지고 가만히 앉아서 살림만 해서는 안 되겠더라고. 내가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집에서 십 년을 일감 가지고 하다가 가게를 내야겠다고 결심했죠. 그러다 보니까 시장까지 나와서 하게 됐어요. 나는 남의 것만 만들지 않고 창의적인 한복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지. 지금은 오빠도 외교관으로 있다가 나이 먹고 퇴직했고, 언니들도 하던 일 정리하고 퇴직하고 있는데, 나도 똑같이 다른 형제들하고 같이 직장을 다녔으면 지금 퇴직해서 놀아야 되는 거지. 그래도 나는 이 나이에도 이렇게 활동할 수 있다는 게 좋은 거지. 어릴 때는 나는 왜 이런 일을 해야 할까 가슴도 아팠는데 내가 형제들만큼 교육은 못 받았어도 똑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나름 위안을 삼는 거지.
가게를 처음 시작했던 때가 기억이 나세요?
나는 벌어다 주는 것 갖고 살림을 할 줄 알았는데, 내가 내 손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게 마음에 부담이 갔어요.
가게 지나가던 사람이랑 눈이 마주치면 내가 먼저 돌려버렸어요. 적응하기가 정말 힘들었지.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내가 안 하면 애들 뒷바라지가 안된다는 생각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그런 절박함이 있었어요. 내가 남편의 도움을 받아서 살았으면 안일해져서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열심히 안 했으면 지금에는 못 미쳤겠죠. 지금 와서 보면 내가 평생 살아가는데 나에게는 좋은 일이었구나 싶었어요.
한복 가게를 운영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손님이나 있다면?
기억에 남는 손님 많죠. 우리나라 사람들도 우리 옷을 잘 안 해 입는데 직장 때문에 한국으로 온 청년이 있었어요. 인도네시아에 있는 여자 친구가 우리나라 한복을 입고 싶다고 그래서 시장에서 한복집을 보러 다녔나 봐. 내가 당의 하고 치마저고리를 걸어놓은 게 있었어요. 들어와서는 걸려있는 옷을 맞추고 싶다는 거야. 당의가 일반 치마저고리보다 비싸요. 요즘에는 좋은 시대라 핸드폰으로 찍으면 금방 전송이 되잖아요. 여자 친구한테 그 당의 사진을 찍어서 보낸 거야. 여자 친구가 좋다고 했는지 새로 디자인 한걸 가져갔어요. 거금을 들여서 여자 친구한테 한복을 선물한다는 게 쉬운 건 아니잖아? 외국에서도 대장금이나 사극 드라마를 많이 보니까 한복이 예뻐 보인 거지.
한복을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자식들도 키웠고, 우리 딸이 결혼해서 애가 셋이에요. 셋째 애기가 돌일 때, 사위랑 애 둘 옷을 똑같이 해 입혔어. 가족사진 찍는다고 그래서 사진관에서 세트로 쫘르르 똑같은 색으로 입고 그러니까 좀 색다르죠. 그렇게 해 입는 집이 있겠어?(웃음) 어디 가서 맞추면 돈이 많이 들잖아요.
한복을 짓는 작업을 오래 해오셨잖아요. 어떠세요?
만족하지. 직장을 다니다 보면 내 맘대로 하는 게 아니잖아. 주어지는 거잖아. 근데 내 일을 하면 성취감이랄까? 구속받지 않고 내 맘대로 할 수 있고 정년퇴임도 없고 몸만 건강하면 용돈 걱정은 안 해도 돼. 이제 와서 보면, 외할머니도 하셨고 엄마도 했고 내가 이렇게 가업으로 해내려 오다 보니까 나름대로 좋은 일 했구나 그런 게 있어요. 나는 지금 젊은 사람이나 누구한테든 그래. 자꾸 다른데 신경 쓰지 말고 한 길을 꾸준히 열심히 가라. 지금까지 내가 하면서 고충도 있었죠. 장사가 너무 안 돼서 내가 이걸 해야 되냐 말아야 되나 싶고. 모든 일은 내가 시간 투자를 해야만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거지 잠깐 해보고 이건 아니다 하고 홱 돌려버리면 아무것도 안 되잖아요. 옆도 보지 말고 그냥 열심히 하는 거야. 확실히 절박함이 있어야 뭐가 되더라고요. 여유로워지면 나태로워져요. 일을 하다가 조금 안 된다고 팽개치면 안 되는 거지. 열심히 안 하고 뭐가 얻어지길 바라나. 나도 진짜 이 나이까지 먹도록 살다 보니까 사람은 뭘 할 때, 내가 모든 걸 여기에 바친다 하는 절박함을 갖고 해야 돼. 어릴 때는 몰라요. 근데 나도 이만큼 살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생각은 어떠세요?
당연히 세월이 가면 늙을 수밖에 없지. 나는 큰 병이 걸렸던 적도 없고, 그런 상황을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지금만 같으면 암에 걸렸다거나 시한부 인생이라고 해도 난 열심히 잘 살았다고 받아들여야지. 긍정적으로.
죽음에 대해서는요?
죽음은 백지장.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삶과 죽음의 경계는 먼 게 아니라 정말 순간이듯이, 멀지 않다.
바람이나 꿈이 있으시다면?
꿈은 없어요. 내가 남을 위해서 재능 기부를 할 정도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은 하고 싶어요.
삶은 예측할 수 없어서 재밌다. 어렸을 땐 힘들었던 일이 지금에 와서는 삶의 동력이 된다. 마냥 나쁘다고만 생각했던 일도 지나 보면 성장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였고, 마냥 좋았다고 생각했던 일도 지나 보면 그리 좋은 것만도 아니었다. 일희일비 하지 않고 묵묵히 갈 길을 가는 것.
영상 촬영/ 편집 현지윤
사진 촬영 박태식
제작 지원 경기문화재단, 수원문화재단
경기문화재단과 수원문화재단의 제작 지원을 받아 진행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코뿔소 프로덕션 #현지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