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권 '철학의 DIY 플러스알파'

《동호문답》 이이의 정치사상 보고서

by 북청로 로데

*이이(李珥, 1536-1584)는 조선 건국 150년이 되어가는 해였던 중종 31년(1536) ‘중간의 쇠망기’로 표현했던 시기에 출생하여 조선 중기 학자이자 문신으로 조선에 맞는 성리학을 제시하며 개혁(경장)할 것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조선 초기 성리학이 한계에 달하자 새로운 이념을 가지고 조선의 경신을 시도하고자 한 것이다.



누가 이슈를 선점하느냐에 따라 흐름을 바꾸어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고, 아니 잡아야 한다고 집착하다 보면 이론은 없고 마음 내키는 대로 국가가 운영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이이가 서술했던 '근본 없는 임시방편책으로 나라를 운영하게 되어 왕도가 시행되지 못했다는 점을 떠올리게 하는 3장 '논군신상득지난(論君臣相得之難 군신이 서로 만나기 어려움을 논하다)'에 해당하는 상황이라고 본다. 현 정치를 조선의 '왕도정치'의 틀로 해석할 수도 없지만, 이이가 말하고자 했던 요점은 배우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데서 '왕도정치'를 행한 군주가 없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이는 양나라 원제가 만권의 책을 읽었지만 위나라의 포로가 되었음을 예로 들면서, 독서는 격치(格致. 격물치지의 준말, 품격과 운치) 가운데 하나일 뿐 읽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말만 잘하는 앵무새와 같다고 비판했다. 그러면 그가 '사가독서 보고서'인 《동호문답》을 선조에게 올리면서 바랐던 것은 무엇인가 생각하면, 사림의 지도로 학문을 깨우친 선조 임금이 이제 그들과 함께 국가를 새롭게 개혁(경장)하라는 요구였던 것이다.




무지의 베일

"그럼 그렇지~"라는 당연한 추임새가 유독 율곡에게 따라붙는 건 삼척동자도 알 정도로 이름난 조선시대 유학자라는 것과 그의 어머니가 신사임당의 사실도 한몫 차지하고 있어서인 것 같다. 그에 대해 앎의 범위가 신사임당의 아들. 성선설. 10만 양병설에 대한 언급. 강릉 오죽헌 정도로 수박 겉핥기도 안 되는 내용인데도 마치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는 착각이 과대 포장된 점이 그에 대한 궁금증을 반감시켜서 독자로서 이이라는 인물에 대한 탐구가 식상하게 느껴진 점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동호문답》 독서의 개인적인 의미는 먼저, 앎에 대한 내용과 정도를 헤아리는 반성 없이 학문적 직진이 무의미하다는 것과 율곡의 사상에 대한 지식을 재해석해야 2022년 현실에서 체화한 모습으로 살아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이가 선조에게 기대했던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선행해야 할 것은 '경장'(개혁)을 통해 나라를 이어가는 것이었다. <성학십요> 위정 편 제4장 '식시무'에서도 책을 쓴 목적이 '경장'에 있음을 알려주는데, 왕도정치는 바꿀 수 없지만, 제도적 문제는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음을 설명했다. 그가 제시한 세 가지 시무는 '창업. 수성. 경장'으로, 새 왕조를 건국한 창업과 지키고 이어가는 수성이 있었으나, 조선이 창업된지도 200년이 되어가는 상황에 '경장을 통해 중쇠기에 접어든 조선을 새롭게 개혁하길 바랐던 것이다.


16세기 조선은 큰 병을 치른 뒤에 치료가 필요하니 경장(개혁)을 시작하라는 줄기찬 율곡의 상소와 서원을 통한 인재 양성과 집필 활동, 가정에서 행해야 하는 구체적인 생활 예절, 《격몽요결》에서 초학자들을 위한 학습 지침서 등 율곡이 제시하는 학문적 성과들은 학자의 모범을 생각하게 했다. 그의 정치사상은 17세기 조선에서 대동법과 균역법으로 집행되었고, '선부후교(先富後敎)'로서 국가는 백성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고 교육해야만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했다.





#동호독서당은 한강 동쪽(현재 서울 성동구 옥수동과 압구정동 사이를 흐르는 한강을 가리킨다.)의 호수를 ‘동호’라고 부른다. (행주대교 부근을 ‘행호’ 또는 ‘서호’라고 부르는 것이다.) 독서당을 거친 사람이라야 대제학이 되도록 제도화하였고, 집현전, 홍문관 못지않은 대우를 받았던 기관으로 평가하고 있다. 세종 8년(1426)에 처음 독서당을 마련하였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기까지 75년 동안 부침을 계속하다가, 중종부터 선조 때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기관이었다.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 란, 일종의 안식 제도로 학자들이 독서당에 들어가 3개월이나 6개월 동안 머물면서 월마다 연구 내용을 보고하는 제도로 운영되었다.

#독서당계화도는, 동호독서당에 입당한 이름을 기록한 산수화로서 입당 사실을 영예롭게 받아들였다.



율곡의 나이 34세였던 선조 2년 6월에 홍문관 교리로서 동호독서당에서 안식월 기간을 보내던 9월에 《동호 문답》을 지어 율곡의 정치적 고민을 담아낸 ‘사가독서 보고서’였다.《동호 문답》의 서술 형식은 이이의 정치사상을 손님과 주인이 문답식으로 주고받는 내용을 중국의 삼대 정치를 '왕도정치'의 모델로 했던 사례들을 예로 들었고, 조선에 맞도록 정치의 주체인 국왕이 사림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받아들이는 군신 공치로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이이의 군신론)



<독서당계화도> 에 있는 이름 가운데, 명종 대 신응시, 구봉령, 이해수,홍성민, 선조대 정유일, 유성룡, 이이 등이다.





차례

1 임금의 도리
2 신하의 도리
3 군신이 서로 만나기 어려움을 논하다
4 우리나라에서 도학이 행해지지 않음을 논하다
5 조선이 옛 도를 회복하지 못함에 관해
6 지금의 시세를 논하다
7 무실이 수기의 핵심
8 간사한 자를 분별함이 용현의 요채
9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
10 백성을 교화하는 방법
11 정명(正名)이 정치의 근본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이이는 18년간 조정과 향리를 오가며 간헐적으로 벼슬살이를 했고, 수시로 벼슬을 버리고 파주와 해주 석담으로 은거한 것은 왕의 우유부단한 태도로 경장(개혁)을 시도하지 못한 영향 때문이었다. 선조와 이이를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관계로 표현한 것을 보면, 비록 이이가 선조의 스승으로 사림의 학문을 지도하면서 새로운 군주제가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긴 했으나 결론적으로 선조는 "나는 불민하여 행하지 못할 것 같다."라고 발을 빼는 무사안일적 태도를 고집했을 뿐이었다. 이이의 화가 어느 정도였을지 추측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이이가 두 번째 <만언봉사> 상소를 올렸으나 선조에게 개혁 의지가 없음을 보고, 42세에 벼슬을 거절하며 "제게 시사에 대해 물을 것이 있으시면 하문하시고, 그 말이 채용될 수 없다면 다시 부르지 마십시오."라고 답했을 정도였다.



그가 34세에 기술한《동호 문답》과 40세에 저술한 《성학집요》가 6년의 시간차를 두고 제왕학에 대한 그의 사상적 발전을 보여준다. 《동호 문답》은 모두 11장으로 구성되어 4부로 나누어 1부 정치의 주체, 2부 정치의 기준과 조선의 현실, 3부 정치의 방법과 실천, 결론인 4부에는 조선에 적용된 현실과 문제점, 또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 및 이름을 올바르게 하는 것(正名)이 정치의 근본이라는 입장으로 되어 있다.

《성학집요》위정 편 4장 식시무(識時務, 그 시대가 요구하는 정치적 과제)에 창업, 수성, 경장의 도를 언급하여 지금이 조선 왕조의 역사에서 '경장'을 정치적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을 강조했다. 그의 시기를 조선의 중쇠기로 바라보고 경장을 이룰 적합한 임금이 선조라고 확신했다.


이 책 6장 '지금의 시세를 논하다(論當今之時勢)' 편에서 손님이 이런 질문을 한다.

"삼대의 다스림을 과연 오늘날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주인이 대답한다. "회복할 수 있습니다."

주인의 대답에 손님이 크게 웃으며 말한다. "어쩜 그렇게 지나치십니까?(장담하냐는 말이겠지요)..."

이에 대해 주인이 대답한다.

"주상께서 용안이 빼어나고 자질이 뛰어납니다. 또 강인하고 총명하며 배우기를 좋아합니다. 공손하고 검소하며 선비를 사랑하시고 두 대비에게 효도를 다하며 만기에 마음을 두시니 이는 진실로 불세출의 성군이십니다. 다스리는 도자 제대로 확립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단지 임금다운 임금이 없을 때 하는 것인데, 이와 같은 임금이 있다면 어찌 이를 걱정하겠습니까? 이것이 첫째 조건입니다."

정치는 임금과 신하가 함께하는 것으로 신하의 정치 참여가 중요하고 그것을 할 자질이 준비된 임금이 선조라고 확신하는 대답이다. 물론, 왕도정치를 이루지 못할 조건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오랫동안 제대로 된 정치를 경험하지 못한 데서 온 침체된 분위기와 선대 왕에서 일어났던 사화들로 인해 선비들의 사기가 심하게 꺾여 있다는 점을 들었다. 그럼에도 주인은 대답한다. "다스림과 어지러움은 사람에게 있지 때에 있지 않습니다. 때는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만드는 것입니다."

주인의 대답에서 다스림과 어지러움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때'에 있지 않다고 주장한 것은 이이의 오판이었음을 이후에 확인할 수 있다. 선조의 덕은 그의 됨됨이였지 그의 통치 능력이 아니었음에도 이이가 지나치게 왕의 도덕적인 면만을 중시하여 '사람'에게 방점을 찍은 것으로 보인다.


다스림과 어지러움에 관해서는 1장. '임금의 도리(論君道)'에서 군주의 직접 통치에 대한 지적보다 신하와의 관계를 군주 통치의 기준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고, 왕도는 몸소 인의의 도를 행하고 천리의 바름을 이루는 것이라며, 패도는 인의라는 이름만 빌려 권모술수로 정치하고 공명과 이욕의 사사로움을 이루는 것인데, 선조의 자질로 보아 그가 바로 왕도정치를 행할 적임자라고 보았다.


그 당시 사정이나 요구에 아주 알맞음을 뜻하는 '시의적절'하다는 의미가 어찌 '사람'만 준비된다고 가능하다 할 수 있겠나. '사람'과 '때'가 맞아떨어져야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스림과 어지러움이 혼제된 정치 상황 가운데서 때에 따라 통치 능력을 발휘하는 군주가 나타나기도 하니. 어떤 임금은 왕도를 행하고, 또 어떤 임금은 패도를 행하여 정치가 언제나 옳다고 여기는 바른 방향으로도 가지만, 그릇된 방향으로도 진행하기에 이이가 생각했던 군신론에서 임금뿐 아니라 신하의 역할이 함께 맞물려 있음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선조가 경장을 이룰 적임자라고 생각했던 이이의 주장만으로 그의 생각이 옳다 할 수 없고, 사람에 대한 평가 특히 통치자에 대해서는 다수가 과연 비슷한 의견을 갖고 있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경장(계지술사 继志述事)은, 초기 세워진 왕조의 틀을 유지하면서 연산군 이후 민생을 파탄으로 몰아간 잘못된 제도를 고치자는 즉, 선왕의 좋은 정책은 계승하되 잘못된 것은 시의에 맞게 고쳐 가자는 것이다.)


*겸선-자신과 타인도 감동시켜 착하게 한다

*자수- 행실이나 말을 자기 스스로 지킨다는 뜻이다.


계부(契符, 약속)


제2장에 ‘신하의 도리(論臣道)’에서는 유가의 논리로,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나아가 겸선천하(兼善天下. 천하와 더불어 선한 일을 함)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물러가 독선 기신(獨善其身. 자기 혼자만 선한 일을 함)하는 도리를 설명하며 '신하의 도리'를 독립 항목으로 다루고 있다. 이것은 남송의 진덕수의 제왕학 <대학연의>에도 간신을 분별하는 방법만 있고 신하의 도리를 정리한 내용은 없는 것으로, 이전까지의 신하론과 비교해서 신하에 대한 도리를 논한 것은 새로운 영역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이는 이 책에서 정치에 나아가는 신하를 자질과 능력에 따라 대신. 충신. 간신으로 나누었고, 청치에서 물러나 스스로를 지키는 데에도 천민. 학자. 은자 세 등급으로 구분했다.


천민(天民)은, 기량을 쌓고도 한가로이 도를 즐기며 재주를 숨겨두고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학자(學者)는, 스스로 부족함을 헤아려 학문을 닦고, 부족한 자질을 보충하고, 때를 기다리고 가볍게 처신한다. 은자(隱者)는, 뜻이 높고 고결하여 세상일에 마음을 두지 않고, 초연하게 세상을 일 잊은 사람이다.

<참고> '동호 문답' 제2장에서 발췌


신하를 구분했다는 말은 곧 '사람마다 지닌 능력과 자질의 차이에 따라 역할을 맡겨야 한다'는 말로 이해한다. 같은 질료의 진흙이라도 화공의 손에서 각기 다른 용도의 그릇이 빚어지는데 하물며 사람은 그 다름이 천양지차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임금과 함께 정치하는 신하는 더더욱 신중하게 구별되어야 하는 것은 중대한 사안이기에 이이로서는 선조가 신하를 선택함에 있어서 바른 안목으로 했으면 하는 바람을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임금과 신하가 서로 잘 만났다고 하는 것은 올바름으로써 서로 믿은 경우에 해당해서, *유능한 임금은 반드시 공경하고 믿는 신하가 있으니 서로 친한 것이 부자와 같고, 서로 뜻이 맞는 것이 물과 물고기와 같고, 서로 조화로운 것이 궁상과 같고, 서로 합쳐지는 것이 계부와 같다고 했다고 한다. (*계부: 목편, 죽편에 글을 쓰고 증인을 찍은 후에 두 쪽으로 쪼개어, 한 조각은 상대자에게 주고 다른 한 조각은 자기가 보관하였다가 후일에 서로 맞추어 증거로 삼는 것이다.) 군신이 만나서 바른 일을 위해 서로를 신뢰하는 것을 목적을 위해 의기투합했다거나 정치적 유불리로 군신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래서 이이는 굳이 신하를 등급을 나누어 설명한다.


결론적으로, 현명한 신하를 등용하는 용현의 문제는, 치인 또는 경세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로, 국왕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며, 이것을 제대로 시행하는 것이 곧 임금과 신하의 올바른 만남의 출발임을 지적한 것이다.






“대개 진유라고 하는 사람은 벼슬자리에 나아가면 한 시대에 도를 행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자유로운 즐거움을 누리게 하고, 관직에서 물러나면 만세에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깊은 잠에서 깨어날 수 있게 합니다.” (이이는 도학을 행하는 선비를 '진유'라고 불렀다. 그의 시대에 '진유'는 사림에 해당한다.)



입지(立志)


앞에서 계부(즉, 일종의 신뢰관계로 맺어진 대상)에서 이상적인 선비로 사림에 해당하는 진유를 분별하여 선택하는 것이 임금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이는 이제 삼대를 회복했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사항들을 설명한다. 첫째로, 입지(立志, 뜻을 세우다). 성인을 표준으로 뜻을 세우되 반드시 성인의 학문을 배우려고 해야 한다. 그다음으로 형식에 매이지 말고 실질적인 효과를 내는데 힘써야만 성과를 거둘 수 있음을 강조했다.


왕도정치를 실현할 불세출의 임금이 선조라고 확신한 이이는, 1장부터 3장에 걸쳐 정치의 주체로 임금과 사림이 군신 공치 하는 새로운 정치의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신뢰관계로 맺어진 군신이 계부가 되어 삼대를 회복했다는 가정 하에 구체적으로 뜻을 세우고 실질적으로 어떤 일을 실행할지를 열거한다. 그래서 《동호 문답》 전체 11장 가운데 9장과 10장의 분량을 가장 많이 할애했다. 특히 9장.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방법(論安民之術)'은 다른 장에 비해 두 배 이상의 문장 분량으로 기술했는데, 이는 결국 '동호 문답'과 '성호십요'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경장(개혁)'의 구체적인 실천 사항에 해당된다.


이이는 정전제나 팔조의 금법이 실행된 기자가 왕도정치가 실현되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삼국시대부터 고려까지 도학이 행해지지 못했다고 보았다. 그 이유는, 고려 통일에서 서로 이기려고 꾀와 힘을 낸 것에 불과했으며, 또 한 가지 이유는, 불교가 국교로 가능했다는 점에서 진유(도학을 행하는 선비)없어 행해지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이어서 조선 역시 세종 대의 정치는 수성의 의미로 좋은 평가를 했으나, 옛 도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실(務實)


빈부격차, 토지소유의 불균등. 무너진 윤리. 이교가 성행. 종묘 제도가 옛 것과 부합하지 않은 당시 상황에서 왕도의 실현은 될 수 없었다. 이것이 이이가 바라봤던 조선의 현실이었다. 민생을 구하기 위해 법을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는 현실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부대가 터지지 않고 술도 보존된다는 말이 있듯이 낡은 구습의 헌부대로 조선의 미래를 담아내는 것을 고민하지 않았던 당시 기득권의 안일함에 따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에게 전가되었다.


9장과 10장에서 긴 분량으로 민생을 구제하기 위한 법제도 개혁과 백성을 교화함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개혁의 순서는 백성의 삶을 먼저 살피고 다음으로 교화해야 효과를 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먼저, 법제도 개혁의 필요성은 민생을 위해 시급한 일이었다. 9장에서 언급한 다섯 가지 폐단을 가져온 직접적인 원인은 사실 법을 악용해서 불의한 재물을 얻는 악순환의 고리를 법이 제 역할을 못하고, 법을 개혁하지 않고는 백성들의 생활고가 회복되지 못할 거라는 위기감을 읽을 수 있다.

이이는 의견 수렴집단에 대한 제한을 두지 않고 신분의 고하 여부를 따지지 말고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언로(言路) 들을 것과 주관 관청이냐 아니냐 상관없이 오직 잘못된 법을 혁파하는 데 좋은 의견을 널리 구하라고 요청한다.


이이가 언급한 다섯 가지 폐단.

°일족절린(一族切隣.군역 대신 포를 바치던 제도의 폐단으로 이웃이 피해를 입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군역과 군액 문제에 따른 마을 공동화 현상까지 나타나는 상황에서 개혁을 통해 국역을 면피한 이들을 색출하고 군액을 충당하고 정규균을 보충하지는 방안을 제시한다. 이것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균역법으로 시행된다.)


°진상번중(進上煩重 진상품과 관련해서 각 도 단위로 진상하는 제도의 분담을 백성이 오롯이 떠안게 되는 형국이 되었다. ‘진상(進上)’이라는 명칭 때문에 바치는 진상품의 수량을 줄이고 물건을 분류해야 한다.


°공물방납(貢物防納. 공물을 직접 납부하지 못하고 방납업자를 통해 납부하면서 생기는 폐단으로, 공물의 품목과 수량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 농민의 부담이 가중되거나 지역 생산품이 아닌데도 마련해야 공납해야 하는 처지로 인해 생긴 폐단이다. 서리와 노비들 가운데 사적으로 물자를 비축하고 관청을 우롱하여 방납의 폐단으로 물가를 못 잡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후 광해군 때에 대동법으로 제도화되었다. )


°역사불균 (役事不均. 병사들의 불공평한 복무 상황에서 의무를 고르지 않게 하면서 생기는 문제들이다. 해당 관청에서 법과 제도를 살펴 수정하여 불균등의 문제를 해결할 것을 제안한다. )


°이서주구(吏胥誅求. 서리들이 부정축재와 뇌물을 받는 사회적 문제로 해결을 위해 서리들의 처우 개선을 해야 한다. 무보수를 일하는 서리들을 위해 복무기간을 마친 서리에게 품계를 올려 주던 것을 중종 30년에 없애면서 뇌물에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서리들의 부정을 시급하게 해결하기 위해 녹봉을 지급하는 해결책을 통해 급료를 지급해서 뇌물로 인한 폐해. 사면조차 돈을 쓰는 상황이다. 뇌물에도 등급을 매기고, 뇌물을 보고 옳고 그름을 가리니 그것이 정치를 어지럽히고 있는 병폐이다. 정당한 여부를 밝히고 실정을 밝혀 백성들의 원통함을 풀어야 한다. 이서가 뇌물을 탐하는 것은 근절해야 하려면 업무에 부합한 녹봉을 주는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에서 낭비하는 물자들을 줄여야 한다. )


민생이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는 원칙하에 이러한 폐단을 타파하지 않으면 병을 고칠 시기를 놓치는 것과 같아서 비록 성왕이 만든 법이라도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이의 답답한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의 폐해가 모두 조종의 법에서 나왔더라도 또한 세조를 모범으로 삼아 이전의 법규를 조금씩 바꾸어 떳떳하고 오래가는 도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조종의 법이 아니고 권간들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은데도 굳이 고수하면서 선왕이 만든 법과 같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곧 음사를 펼쳐서 난을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도리어 제가 조종의 법도를 바꾸어 혼란시킨다고 하는 것입니까?”


백성의 삶을 위한 제대로 된 법 시행과 개혁이 있은 이후에 뒤따라야 하는 것이 백성을 교화하는 문제로, 이이의 '교육을 통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교육 철학이 담겨있다. 가르치는 사람이 없이 배울 수 없고 배우더라도 자격을 갖춘 스승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제도적으로 이미 운영되고 있는 학교를 활용하되 학교제도를 개편하되 가장 먼저 훈도를 획기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방안으로는 각 지방에서 3년에 한 번 경전과 역사를 교육할 만한 사람을 뽑아서 이조로 보내고 공론을 살펴 선정해야 한다. 그리고 선발된 훈도는 지방관이라도 우대하도록 한다. 유생도 등급을 나누어 포상하고 관직에 임명할 것을 제안했다.


말이 힘

식당에서 일하시는 한 아주머니께서 이런저런 말을 하시다가 '말이 제일 중하지'라고 하시면서 말로서 못할 것이 없다는 나름대로의 논리를 장황하게 설명하시는데 듣다 보니 수긍이 가는 말씀이었다. 즉, '말이 갖는 힘'에 대해서 누구나 인식하고 있는 만큼 '말이 나타나는 것'과 되는 것이 말이 드러내려는 실체일텐데. 이이의 정치 사상적 스케일은 당대를 너머 후대가 과업을 이루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이이는 손님과 주인의 문답식 형태의 보고서로 34세 아직 장래가 촉망받는 이이의 개혁의지를 보여준다. 선조의 무능이거나 우유부단한 성정 때문이거나 어떤 이유에서건 선조가 실현한 것은 정말 코끼리 발톱 정도에 그쳤다는 사실은 역사가 평가하고 있는 내용이다.

주목해서 보는 건 이 책의 저자이다. 저자가 바라본 조선 중기 사회상에서 불필요한 제도와 개혁의 내용들이 보았을 때 망설이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는 점에서 그의 역할을 다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한다. 조정에 나가서는 신하로서 향리에 머물 때는 스승으로서 가정에서는 가장으로서 일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았던 선비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간혹 길을 가다 보면 풀이 자라지 않을 곳에 민들레꽃이 쑥 올라와 있고, 민간에서 약이라는 비단풀도 뭉탱이처럼 자라는 게 보인다. 누가 그것을 뿌렸을까? 바람을 타고 날아와 그곳에 떨어졌겠지. 흙밭인지, 아스팔트인지, 시멘트 바닥인지 꽃씨는 땅을 보고 앉지 않는다. 그러면 땅이 씨앗을 키웠다는 말도 성립되지 않는 게 꽃씨의 성장을 위해 단기간에 무언가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엔 꽃씨의 일생을 보장하는 땅은 못된다. 결국 황무지로 되어가는 땅을 기경해야 할 책임이 있는 땅 주인에게 묻고 싶다. 그렇게 바람을 타고 날아드는 씨앗이 앉아 자연적으로 결실하길 기다리고 수확하는 것이 주인으로서 역할을 다 한 것인가? 자신이 못하겠으면 사람을 빌어서라도 좋은 땅으로 개간하는 게 옳지 않나 생각한다. 이이가 바라던 '무실이 수기의 핵심이다'에 해당하는 행동이겠다.





정명(正名)


마지막에서 이이는'정치의 근본이 정명(正名)'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즉, 이름을 바로잡는다! 그 행동에 따른 이름을 바르게 불러서 헛된 칭찬과 자기 만족에 빠지지 않게 함으로서 타산지석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 같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임에도 국시가 정해지지 않았고, 명분을 바로잡는 것이 끝나지 않아서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운을 떼고 나서 그는 다섯 간흉(정순붕. 윤원형. 이기. 임백령. 허자)의 죄목을 열거함과 동시에 그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고 방관하는 선조를 보니 임금이 모르는 것 같다고 돌려서 까고 있다. 그리고 지금 해야 할 일은 정명하는 것으로, 당장 다섯 간흉의 죄를 폭로하여 관직을 박탁하고 공훈을 없애고 무죄한 사람은 사면하여 종묘사직에 고하고 나라를 새롭게 시작하라는 조언하고, 자신의 의견이 실행된다면 조선은 앞으로 삼황오제의 다스림을 보게 될 것이라는 기대로 마무리한다.



그가 죽고 8년 뒤 임진왜란을 겪은 뒤. 이후 조선의 300년은 그의 학문과 경장을 실천해나간 역사였다. 공납 개혁은 대동법으로, 군정 개혁에 대한 제안은 균역법으로 실시되었다. 군주이자 스승으로의 군주상은 영조. 정조. 고종에서 수용되었고 서얼차대에 대한 비판은 허통으로 바뀌었다. 상부상조의 계와 그것을 실행한 향약은 기호 지방 향약의 표준이 되었다. 노비를 양인으로, 노비와 상전의 관계를 군신관계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그의 개방적 신분 사상도 조선 후기 개혁 사상가들의 지표가 되었다.



DIY(Do it yourself)?

철학적 소견은 DIY로 전개해나간다 하더라도 실제 현실로 구현되기까지는 다양한 플러스알파가 제공되어야 한다. 중쇠기 조선을 새롭게 개혁할 준비된 임금을 선조라고 믿었지만 임금은 이이의 철학에 플러스알파로서 돕지 못했다. 오히려 이이 당대에는 실현되지 못한 생각이었지만 그의 사상은 누군가를 살리는 생각이자 마음이 아니었을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