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하게 자연스럽게 사랑하다

유배지에서 조희룡이 보여준 모습들

by 북청로 로데


19세기 조선의 문인이자 화가였던 조희룡을 발견했다. 조선 역사 기행을 시작한 독서에서 ≪조선명저기행≫. ≪나의 길을 가련다≫, ≪역사, 길을 만들다≫를 눈으로 더듬어 쫓아가다 보니 조희룡(1789-1866)의 유배길에 이르렀다. 21세기에 있는 인간이 19세기 뜻풀이 사전에서 낯선 단어를 찾아 수시로 뒤적이다 보면 또 다른 생소한 문자가 한 페이지 안에서도 도적떼처럼 이곳저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난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은 적잖이 내게 위안과 포만감을 안겨줬다.

전라도 신안군 임자도 바닷가 근처에 마련된 움막집에서 유배 생활을 시작해야 했던 그 낯설고 어색한 적응을 위한 노력에 나도 조금은 기여하는 것 같은 착각 속에 고어 뜻 찾기를 하면서 조희룡에게 좀 더 줌인(zoom in) 할 수 있었다.



사람에게 시선이 끌릴 때는 각 사람으로부터 발산되는 독득한 빛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빛이 없고서 어떻게 존재 자체만으로 타인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겠나. 일반의 지극한 평범함 속에도 빛이 있고, 어둠의 저 끝에서도 빛은 투사되고 있듯이 사람이 ‘그곳에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든 자신만의 빛이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빛의 역할이 ‘드러냄 그리고 거두어냄’에 있다면 빛이 집중됨을 통해 그를 둘러싸고 있던 ‘그 외의 부산물들’은 거둬지고 독특한 ‘있음’으로의 존재가 드러나게 된다.



≪역사, 길을 만들다≫에 수록된 아홉 가지 길 가운데 유배(귀향)의 길을 향했던 조선시대 하고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조희룡을 등장시킨 이유는 유배의 이전과 이후의 그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유배길이라고 해서 모두가 ‘사지‘로 끌려가는 게 아님에도 비참한 상황이 연상되는 이유는 ‘단절’ 때문일 것이다. 자신에게서 끊어진 단절은 자유의사로 결정한 마침이겠으나, 타자에 의한 ... 그것도 나라가 단죄해서 도성 밖으로 내쫓을 때의 단절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해 무거운 질문을 던지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인생에 찾아오는 숱한 길들 가운데 지금까지 걸어왔던 익숙한 어느 길이 닫힌다고 해서 모든 길이 닫힌 것은 아니었으니, 곧 그의 ‘유배길’은 이제까지 상상해본 적 없고 경험해보지 않았던 길로 조희룡을 인도했다.

유배지에서의 조희룡
섬마을 임자도에서 예순의 조희룡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지금까지 그가 보금자리요 안식처요 즐거움으로 살아왔던 문인의 껍질을 온전히 벗겨내기에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바닷가 마을의 평범함 이었다. 조희룡에게 즐거움을 주었던 지식과 문화의 다채로움이 빠져나간 자리를 대신할만한 희락의 요소들은, 그보다 먼저 임자도로 유배 온 우석 선생과 벗이 되었다는 것과 파도와 함께 촤~하고 쏟아져 들어왔다 나가는 돌 줍는 섬마을 아이들의 소리, 그리고 신분은 낮아도 남다른 재주가 있는 마을 사람들의 소소한 풍경이었다. 그는 마치 대도시 높은 건물들 사이에서 흙 밟을 기회조차 없던 도시남 이었을지 모른다.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있으면서 청나라에서 수입된 지식과 문화를 접하고 쌓아가던 지식의 맛을 지우려고 입을 헹궈야 했음에도, 다가오는 변화의 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그는 임자도의 풍경을 글과 그림에 담기 시작했다.


유연하게, 자연스럽게, 그리고 변화.
조희룡이 부서지거나 망가지지 않은 그 무엇에 대해 생각하며...




내 주위에는 기도와 격려로서 세워주고 싶은 친구들이 있다. 그래서 지난 해 12월 한 달 동안 서로를 기억하며 축복하는 시간을 각자가 보내보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 2021년 1월이 되자 아쉬움이 남아서 친구들에게 “한 달 연장하는 건 어떠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동의해서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처음 한 달간은 체질화되지 않은 행동을 하느라 애를 쓰는 것이 나의 역할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익숙한 하루의 일과이자 즐거움이 되었다. 왜냐면, 체질을 바꾸려고 애쓰는 게 변화를 바라는 내 몫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 좋은 것을 나누려는 심정이 몽글몽글 돋아나는 그 맘을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따라갈 때 ‘변화’라는 물줄기가 흐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무명천에 색을 물들이듯 유배지에서 조희룡의 하루하루는 살아있는 배움의 시간이었다. 조희룡은 대부분의 시간을 먹과 함께 보냈으며, ‘천지가 글이요 그림’이라고 표현했듯 그에게 시와 그림은 같은 근원에서 싹튼 두 개의 표정으로 시와 그림의 대한 그의 시각을 정립했다. 그건 지금으로 말하자면, 글과 그림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는 다재다능한 사람들을 연상케 한다. 글 사이마다 자신이 직접 촬영한 사진을 군데군데 편집해서 글이 전달하려는 이야기를 한층 또렷하게 보여주는 작가들의 작업과도 닮은 구석이 있다. 유배지에서의 조희룡의 생활을 읽으면서 내가 발견한 사실은 억지로 하지 않아도 주변에 눈을 돌리면 변화의 물꼬가 열린다는 것이다. 그 변화는 주변이 아니라 자신 안에 굳건하게 버티고 서있던 자아에게 주어지는 값진 선물이다.



낯선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경계심에 아이들은 그에게 돌을 던지기도 했지만, 그는 아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매화 그림을 선물하기도 했고, 돌을 줍는 섬마을 아이들을 소재로 시를 쓰기도 했다. 매화에 집착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매화 그리기를 즐겼던 그의 매화 그림이 다른 이들의 그림과 차별성을 두는 이유는 ‘용매화’라 해서 용이 꿈틀거리듯 살아있는 매화를 그렸다는 점이다.

조희룡은 글 쓰듯 그림을 그렸고 자유분방함에서 비롯된 활발한 생동감이 꿈틀거린다. 긴 두루마리에 그린 <매화서옥도>는 동화를 연상시키는데, 그림 하단부 중앙에 놓인 움막집에는 화병에 꽂힌 매화를 응시하고 있는 조희룡의 모습이 보인다. 종이 위에 글자를 흘려서 쓰듯 그린 것은 집 주위에 군락을 이룬 매화나무에서 뿌려진 꽃눈들을 점점이 찍어 그림인듯 글인듯 한 편의 동화를 창작했다. <홍매도>는 굵은 가지마다에서 붉은빛의 매화는 풍성하게 꽃망울을 터트리며 시선을 끈다.



‘성찰. 자기반성’ 그리고 ‘애정’


조희룡은 1853년 3월 14일 해배의 명을 듣고, 3월 18일 임자도를 떠나기까지, 사흘간 마을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고별인사를 했다. ‘떠나는 그의 뒷모습이 아름다웠다’ 사람이 사는 곳에 정이 없다면 그곳이야말로 감옥 같은 유배지가 아닌가 싶다. 그는 사람들이 생활하는 곳에 잠시 머물면서 조금 더 넓어지고 깊어졌을 것이다.



조희룡은, 나이 예순에 그저 유명 문인의 문하를 드나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임자도에 유배를 가서 햇수로 3년(1851.8.22-1853.3.14)을 그곳에서 보냈다. 달팽이만한 황토움집 그의 방에는 소동파의 전신상 <동파입극상>을 걸어두었고, 유배지 곳곳을 산책하며 경물을 관찰하여 예술적 차원으로 만들어갔다고 전해진다.


낯선 유배지에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음에도 해배(유배를 풀다) 이후 그는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유배되기 전의 지난날이요 자기반성’의 성찰적 기록물로 정리하여 ≪화구암난물≫로 묶었다. 유배기간 동안 모두 100여 수의 시를 짓고, 편액(액자)로 ‘화구암’, ‘만구금관’(수많은 갈매기 소리가 들린다), ‘남명시려’(눈에 보이는 모든 게 시처럼 아름답다)를 담아냈다.

<매화서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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