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권. 나무의 마음은 죽지 않아

《추강집》 15세기 후반 남효온의 선집. 평전

by 북청로 로데

*남효온(1454~1492)


(저에게는) 낯선 이름. 낯선 사람의 행적입니다.

남효온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추강집》을 읽으며 정리하고, 남효온의 주변 인물들의 역사적 행적을 쫓아가면서도 제게는 낯선 사람. 낯선 이름 추강 '남. 효. 온'입니다.

'추강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재주와 능력이 있음에도 자취를 남기지 않은 이인(異人비범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를 《황정경》을 잘못 읽어 하늘에서 귀향 온 신하라 하였는데, 아래 '황정경' 시문입니다.



이천 리 밖 남쪽으로 귀향 온 사람은

40년 전에 총욕을 받은 몸

해마다 앉아 강 물결만 바라보는데

금계는 어느 날에나 귀양 보낸 신하를 다시 부를까










1. 세상 밖으로 불러내다.


'추강집'은 15세기 조선 문인 남효온에 대한 평전으로 그가 기록한 시문을 근거로 그에 대해 알 수밖에 없습니다.

남효온을 소환한 사람은 중종 6년(1511년 그의 사후 19년이 지난해) 참찬관 (*조선시대 국왕에게 경서 강론 및 경연에 참여했던 정 3품의 당상 관직) 이세인이 명현의 문집을 간행할 것을 간청하면서 명단에 성현, 어세겸, 조위, 유호인과 함께 말미에 남효온을 적어 올립니다. 이후 그의 절친이었던 조신이 흩어져 있던 남효온의 시문들을 수습하고 엮어 마침내 그의 유고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됩니다.

스물다섯 나이에 백면서생이었던 추강이 성종 9년(1478년) 4월 1일 흙비(황사비)가 내려 재해를 입었을 때 신하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왕에게 올렸던 ‘소릉 복위와 8개조’ 상소는 평생 남효온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녔습니다. 그와는 대척점에서 권력을 쥐고 있던 훈구세력들은 그를 "미친 서생"이라고 비웃었습니다. 이에 대해 ‘추강집’ 발문을 쓴 조신의 글에도 수욕을 당한 추강에 대한 내용을 엿볼 수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이 우리 추강을 낳으니, 곧은 절개로 세상에 홀로 섰네.

성품이 세상과 영합하기를 싫어한지라. 세상을 피하여 치욕을 멀리했지.

취중의 얘기는 공연히 준엄했고, 세상을 경시하며 늘 크게 웃었네.

지위에 벗어나 국시(國是)를 의논하다. 집안을 깨뜨리고 부관참시당했도다.


-오언고시로 지은 ‘조신’의 발문-





# 사담 1. ‘말 한마디의 가치’ 경솔함 없이 사람을 택하며 간청


자기 역할에 충실한 사람의 한 마디 말이 주는 중요성을 이세인의 간청을 통해 볼 수 있다면, 그의 시문들을 수집하고 엮어 ‘추강집’을 세상 밖으로 내놓은 추강의 절친 조신의 수고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작업은 6년 전이었던, 연산군 제위 10년(1504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된 추강이 복권되는 신호탄이기도 했습니다. 이세인이 문집에 넣을 명단 끄트머리에 남효온을 적었다는 것에서 고심한 흔적이 보입니다. 문신이었으나 벼슬에 오르지 못해 스스로 죽림칠현을 자처하여 죽림 우사를 결성하고 시주(詩酒시경과 술)와 청담(淸談맑고 고상한 이야기)의 삶을 살다 간 남효온의 삶에 대해 후대 역사가 재평가할 기회를 준 것입니다.


울산에는 울주군 가지산과 고헌산 등에서 발원하는 남천을 본류로 하여 동쪽으로 흘러 온 물이 바다로 빠져나가는 태화강이 있습니다. 도시를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강 주변으로 시민들의 산책로이자 휴식처인 태화강 공원이 있고요. 남구와 중구를 잇는 다리 아래로 내려가서 십리대숲 방향으로 걷다 보면, 잔디밭 가운데 한 그루 고목나무가 있습니다. 점심을 먹고 잠깐 산책하러 지나가다 나무 앞에 세워진 푯말을 발견해서 읽어보니, 공업화로 인해 1980년대 이후 용연동 일대 바닷가 마을이 철거되었고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은 모두 이곳저곳으로 흩어졌습니다. 용연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기념수로 고목나무를 심어놓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그 고목이 갑자기 특별한 나무처럼 보이더군요.

‘드러내지 않으면 지워진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제 어린 시절에 존재했던 마을을 푯말에 글로 새겨놓았기에 용연을 다시 떠올렸던 것 같이, 추강의 시문을 흩어진 채 방치했다면 남효온이라는 이름과 그의 행로를 어떻게 기억할 수 있었겠어요? 사람은 가고 기록은 남는 것이지요.








2. 두 개의 코드 '방외'와 '절의'


‘방외方外’와 ‘절의节义’ 두 개의 코드로 기억되다. 두 개의 코드는 하나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소릉 복위’ 상소. 그것으로 빚어진 결과가 ‘방외와 절의’의 삶으로 이어졌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방외인(아웃사이더)’으로

-그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던 ‘소릉 복위’ 상소 건(성종 9년 추강 나이 25세) 이후, 성종 13년(1482) 성균관 유생들의 ‘벽서시’ 사건이 터지자 추강의 이전 상소가 다시 문제가 됩니다. 그것을 트집 잡은 훈구파 권력자들의 탄원으로 모든 유생들과 함께 혹독한 고초를 당한 그는 다음 해, 서른 살이 되던 1483년에 과거 시험을 접고 행주로 들어가 은거하면서 농사를 짓고, 남포에서 낚시를 하는 죽림 우사의 행로를 걷습니다.

1483년 그 해 3월 29일 식년시(과거시험)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김시습이 서울을 떠나 관동으로 가면서 세상과 정말 등지는 시기였으며, 그해 5월 무렵 마침내 추강도 시험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성균관 유생들의 벽서시=
(대자보에는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폐비 윤 씨 사사를 반대한다.
*무능한 성균관 교수(가르침)를 풍자한 시를 썼다.
*이 일로 유생들 전원이 투옥되고, 한 달간 국문을 당하였으나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절의’의 사상으로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남효온의 <소릉 복위>는 내용상으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한 글이었고, 그것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기록이 되었습니다. 남효온의 '소릉 복위'를 문제 삼았던 정창손, 임사홍, 서거정 등 훈구 대신들이 그를 국문해야 한다고 요청하면서 일이 커졌지요. 그의 상소로 인해 세조의 불법에 협력한 대가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던 훈구 대신들의 분노가 폭발했던 것 같습니다. 단종의 죽음에 관해 함구하던 상황에서, 8개 조의 조언과 함께 '서릉복위' 즉, 단종의 모친의 종묘를 복위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듬해 1479년(성종 10. 그의 나이 26세)에 그가 단종이 죽음을 맞았던 영월로 갔던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 《육신전 六臣傳》을 창작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역사에 ‘사육신’으로 불리는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여섯 명이 있다면, 살아 있는 동안 충절을 지키려 했던 ‘생육신’의 명단(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에 그의 이름이 올라가 있습니다. 《육신전》은,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죽은 여섯 역적(세조의 입장에서)을 충절의 인물로 되살리는 내용으로 집필한 책입니다.

*‘추강집’ 제8장에 약전 형식으로 쓴 《육신전》은 단종 복위 운동(병자사화) 때 죽은 사람들 가운데 여섯 명을 선별하여 충절의 인물은 칭송하고, 세조를 도와 왕위 찬탈에 협조했던 불의한 인물은 고발하는 내용입니다. 주변의 만류에도 이 글을 썼다는 내용이 《연려실기술》에도 실려 있습니다. 약전은, 단종 복위 운동을 밀고한 김질과 정찬손의 배신을 박팽년의 약전에 배치하고, 세종에게 신의를 저버린 신숙주와 최항의 처사를 성삼문의 약전에 배치하고, 왕위 찬탈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한명회와 권람의 행태를 유응부의 약전에는 배치하여, 충절로 죽어간 인물들과 불의를 행했던 인물을 대비시킴으로 누가 역적이고 충신인가를 보여주려 했습니다.





#사담 2.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면 잠잠해야 할까?


‘변화’는 그것을 원하는 입장에서는 명분과 함께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의 아이템입니다. 변화를 갈망할 수도 있고, 변화에 대한 염원이 없을 수도 있고, 지금 그대로 무난하게 살기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요구의 정도를 얼마나 충족시켜주는지와 무관하게 변화는 언제나 일정한 시기에 찾아옵니다. 그럴 때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을 기본 사상으로 삼는다면 다양한 기대치를 충족시킬 수 있는 실천적 사안들이 만들어질 거라 생각합니다.


남효온의 상소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했던 훈구 세력의 원조는 조선의 개국을 도왔던 혁명파입니다. 개국공신 남재가 남효온의 5대조입니다. 즉, 그의 5대조의 행적으로 추강을 이해한다면 그는 변화를 원하는 훈구파의 일원이 되었어야 하지만 오히려 그는 가문의 줄기와 다른 곳을 향했습니다. 그는 15세기 사림파의 영수였던 김종직의 사상을 따르길 원했습니다. 그 때문이어서였을까요. 그가 기대하던 변화는 미완의 꿈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지닐 수 없는 마음에 품었던 말을 했고, 비록 벼슬에 오르지 못했으나 성종의 구언에 즉시로 응답했으니 남효온이라는 나무의 마음은 죽지 않은 것입니다.








3. 위로를 삼았던 술과 유람, 벗들


남효온은 참담한 자신의 처지를 술과 유람으로 보냅니다. 폭음으로 병이 들면 단주하고, 다시 나아지면 술을 마시기를 반복하다 보니 친구들이 하나둘 그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친구들은 죽거나, 낙향하고, 귀양을 가거나, 남효온을 기피하며 멀어져 갔습니다. 그리움과 외로움을 품은 채 추강은 전국을 유랑하다 만년에 방랑을 그치고 서울로 돌아와 벗들을 추억하며 경지재에서(그의 서재) 《추강냉화秋江冷话》와 《사우명행록 師友名行錄》을 집필합니다.




《추강냉화秋江冷话》

이 책은 《사우명행록》과 함께 그의 만년에 집필한 것으로 남효온이 직간접으로 들은 총 68편의 일화로 된 잡록 형식의 기록입니다. 잡록이라서 일정한 형식이 없이 산만한 느낌을 주지만, 그가 자신의 일화를 '냉화冷话'라는 이름으로 묶은 이유는 당시 훈구 대신이 편찬한 잡록들의 일화와 분명하게 구분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추강집》의 산만한 느낌을 상쇄시키고 그가 선별한 일화를 읽을 때, 당대 정치 현실의 동태, 그의 행로에서 만난 인물과 사건, 내면의 정서를 담아낸 시문들과 연계해서 읽으면 각각의 일화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참혹한 현실을 외면하려 술을 즐기고 전국을 유랑하던 남효온이 벗들을 추억하며 쓴 마지막 일화는 그가 죽기 2년 전이었던 앞서간 절친 안응세의 꿈을 꾸고 《호산노반湖山老伴》에 발문을 썼다고 합니다. 자신보다 한 살 아래의 절친이었던 안응세는 1480년 성종 대에 과거에 합격하고 여섯 달 만에 요절합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20여 편의 애도시를 썼고, 이후에도 자주 꿈에 나타났으며 그가 과거를 포기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해요.


*참고로, 당시 분위기는 사대부 사회에서 떠돌던 일화들을 훈구 대신들이 수집. 편찬하던 시기로서, 대표적으로 서거정이 편찬한 《동인시화》, 《필원잡기》가 있다.



《사우명행록 師友名行錄》

그의 고독은 깊어갔고 전국을 유랑하며 마음을 달래다가, 만년에 병들고 지친 몸으로 서울로 돌아와 경지재에서(*추강의 서재 이름) 벗들을 추억하며 그들의 특기할 만한 명성과 품행을 약전 형식으로 집필한 책입니다. 재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세상에서 버림받았던 많은 벗들에 대한 추억을 통해 그 인물들을 어렴풋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책에 실린 54명 가운데 각별한 인연을 맺었던 14명을 선별했는데 그들은 직간접적으로 점필재 김종직과 관련을 맺고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김종직으로부터 김굉필. 정여창은 도학을, 김시습. 남효온은 청고한 정신을, 김일손. 조위는 문장을 배워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9명의 친구들은 이름만 적어 놓았을 뿐 내용을 비워 놓아서 그의 그리움조차 '미완의 추억'으로 남게 된 것 같습니다.

그는 책에서, 스승 김종직에 대한 견해 차이로 불편한 관계였던 김굉필을 책 맨 앞에 올린 반면, 그가 가장 의지하고 아꼈던 안응세를 뒤에 올렸다는 것은 좀 의아합니다.

그는 책 말미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20년 전 함께 했던 술친구들, 지금은 영락하여 탄식만 할 뿐이라오.”

“늙어서 만난 이는 모두가 새 벗이니, 옛 친구 그립기야 말하여 무엇할까.”





#사담 3. 인간 안에 치유책 "추억하는 인간"


그는 살아서는 생육신에 이름이 올랐으나. 죽어서는 부관참시를 당하였고 맏아들은 사형에 처해져 거리에 효수되었습니다. 굶주림과 학질로 신음하던 둘째 아들이 죽었을 때는 극심하게 궁핍한 형편 때문에 한 달 동안 장사를 지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후 맏사위의 죽음. 어머니처럼 의지했던 고모의 죽음을 겪으면서 남효온은 본격적인 방랑을 시작하게 됩니다.

신진 사류로 나타난 김종직의 제자들은 《소학》을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의 실천적 사상을 중시하는 '소학파'로 등장했지만, 훈구 대신들의 집권 하에 그들의 재능을 펼쳐보지 못하고 꿈을 접어야 했던 시대를 살면서 남효온은 술과 유람으로 세월을 보냅니다.

그렇게 보면 그는 아픈 사람이었습니다. 만족할 만큼의 위로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테지만 벗들을 '추억하는 것'이 스스로를 치유하는 처방이 되었을 것입니다. 굶주림이 끼니였고, 정처 없음이 그의 거처가 되었고, 비정상적인 음주 습관으로 몸조차 망가졌지만, 맏사위의 사망 소식을 들은 뒤에는 살아갈 소망마저 끊어져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다가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만시> 지었습니다.


《추강집》 8장에 배치된 육신전, 추강냉화, 사우명행록은 그가 스스로를 위로해준 치유책으로서의 글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주변은 바뀐 게 없지만 그의 추억 속 벗들을 글로 옮겨 적으면서 서른아홉 고단했던 생을 비로소 놓을 자유를 얻었을 것입니다.





4. 그에 대한 신원과 평가


39세 짧은 생을 살다 간 남효온의 사후 21년이 되던 중종 8년(1513년)에 신원되었고, 그로부터 270년이 지나 정조 대에 생육신과 함께 추증됩니다. 조선 조정에서 남효온의 사후 3백 년에 걸쳐 그의 신원을 회복시키고 벼슬을 하사했던 데는 신하의 선악을 구별하여 후대에 권장과 징계를 전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남효온을 평생 따라다녔던 꼬리표가 된 '소릉 복위 상소'를 두고, 허균이 《성소부부고》에서 남효온에 대해 두 가지 점을 들어 비판했습니다. 첫째, 수양이 부족한 스무 살 젊은 나이에 철없이 올렸다는 점. 둘째, 상소 내용이 직설적이어서 실언이 많았다는 점이라 했습니다. 즉, 좀 더 수양을 한 뒤에 차근차근 일을 처리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비판이었던 것 같습니다.




맺는말


추강 남효온의 시대는 다양한 사상과 의견을 담아낼 그릇이 준비되지 않았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비록 남효온에 대한 허균의 비판이 정론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그의 생각에는 공감 합니다.

그렇지만 15세기 조선은 젊은 선비가 자기의 소신을 밝히고 홀로 권력의 간고한 벽을 돌파하고 살아내기엔 역부족이었겠지요. 그래서 그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 그가 집필한 시문을 통해 그 시대 지식인으로서 고민을 앞으로 지금 제가 처한 현실에서 해보겠습니다.

지나치게 분열되고 갈라진 사회에서 사람들은 모래알처럼 뭉쳐지지 않고 각자도생하는걸 미덕처럼 여기고, 시대정신이 실종된 것 같은 지금 이곳에도 고민들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많습니다.

독서후 글을 정리하는데, 《추강집》에 대한 저의 이해가 농익지 않아서 피상적으로 정리한 노트가 된 것 같은 아쉬움이 큰 독서 후기를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글을 잘 이해하면 군소리도 없이 짤막하게 정리했을텐데.. 남효온 낯선 그를 알려고 쫓아가다보니 사설만 장황하게 길어졌습니다.

끝으로 누군가는 말하고 또 누군가는 그 말을 경청하는 게 세상이 조금은 앞으로 굴러가게 하는 윤활유적 자세가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긴 글 여기서 갈음합니다.




[아래는 참고로 적었습니다.]


정조 8년 (1784) -남효온에게 문정(文貞 학문에 바르다)이란 시호를 내리다.

(*시호를 내리는 목적은 신하의 선악을 구별하여 후대에 권장과 징계를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조 6년 (1782) -그가 이조판서에 추증되다. 김시습. 원호. 성담수 등도 함께 추증되다


중종 8년 (1513) -그는 신원되어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중종 5년(1510) -'조신'(추강의 절친)이 흩어진 추강의 시문을 수습하여 <추강집>을 엮고, 발사를 지었다.


1504년(연산군 10) - 남효온이 부관참시. 아들 남충세 사형


=소릉 복위=
추강의 나이 25세였던, 1478년 성종 9년 4월 15일에 그가 올린 '소릉 복위 상소'이다.
소릉은 단종의 모친(문종의 비. 현덕왕후)의 묘를 복위하는 것과 8개 조를 함께 올린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모친은 서인으로 강등되면서 종묘와 능묘에서 내쳐졌다.
성종 9년 4월 1일 하늘에서 흙비가 내리는 상황에서 성종이 구언한다는 전지에 따라 올린 글이다.
그의 상소는 <성종실록> 9년 4월 15일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상소를 계기로 훈구 대신들의 미움을 받아 벼슬길은 막혔고, 세상으로부터 그를 '미친 선비'라고 손가락질받게 되었다.




<역사 알아가기>


- 조선 건국과 파당. 무오사화. 갑자사화. 조의제문. 김종직

*조선왕조의 건국에 대한 찬반양론으로 혁명파 vs 온건파로 나눠졌던 것이, 이후 중앙정치의 주도적인 세력이 된 훈구파와 지방 세력화를 꾀했던 사림파(성종 때 중앙으로 진출)로 대립하는 양상이 되었다. 훈구파 vs사림파(도학파) 간의 대립에 네 차례의 사화가 발생했는데, 연산군 제위 때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중종 때에 기묘사화, 명종 때에 을사사화이다.

남효온과 직간접으로 연관된 사건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인데, 연산군 제위 4년 차인 1498년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에 의해 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남효온의 스승 점필재 김종직(1431-1492 사림파의 영수)이 부관참시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해에 남효온은 질병으로 죽는다. 김종직은 무오사화의 단서를 제공한

조선 전기 사림파 학자의 특징적인 요소는 <소학>을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의 실천이었다.

점필재는 소학을 가르치며 이렇게 말했다.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두려면 마땅히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광풍제월(光風霽月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인품을 일컫는 말)도 여기(소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무오사화(1498) 때 그의 제자 김일손(1464-1498)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史草 원문헌)에 수록하는 일이 연산군의 필화 사건으로 이어졌다.

그러면, <조의제문>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1457년 김종직의 나이 27세 때 쓴 글은 표면적으로는 조문하는 내용의 의제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김일손은 이 글이 사림파의 사상을 잘 반영한다고 판단하여 사초에 실어, 사초 문제로 무오사화가 발단이 되었고, 결국 6년 전에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하기에 이르렀다.

'사화'의 뜻과 같이 훈구파의 계략으로 사림파가 대대적으로 화를 당했다.



[추강 남효온의 약력]


1492년(성종 23, 나이 39세) -경기도 고양 대장리에 장사되었다가 현재 도시개발로 인해 그의 묘는 김포시 하성면 후광리에 옮겨졌다. *<소문쇄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되어 시체를 양화도 모래밭에 버리게 하였고, 시체를 거두어 장사 지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시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아마도 경기도 고양에 있던 무덤에도 그의 시신이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


1491년(성종 22. 나이 38세) -마지막 유람(부여-담양-영광-장흥-밀양-금오산-서울)

*전국을 유람하던 남효온은 1월 23일 이총과 함께 부여 지역을 유람하고, <부여회고> 10수를 지었다. 부여-담양에 이어 영광을 지나, 2월에는 그의 7대조 남천로의 묘소에 제문을 지어 올렸다. 3월에 장흥에 도착하여, 유배와 있던 친구 윤구와 다른 인사들을 만나 회포를 풀며 <조대기>를 지었다.

그리고 늦가을, 밀양에 내려가 있던 김종직을 만나 '영남루'에서 함께 담소를 나누고, 내려가는 길에 금오산길재 유적지를 방문했다. 이후, 전국을 방랑하다 서울로 돌아간 그는 죽음을 예감하는 <애인생부>와 <득지락부>를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1490년(성종 21. 나이 37세) - 시월에 절친이었던 죽은 안응세를 꿈에서 보고, 시집 <호산노반>의 발문 사실을 <추강냉화>에 기록하다.


1486,1488년(나이 35세) -연이은 가족들의 죽음.

1486년 2월에 둘째 아들 남종손이 굶주림과 학질로 죽었고, 7월에 고모를 장례 했으며, 1488년 9월에 맏사위 이온인이 죽었다.


1485년(성종 16. 나이 32세) -금강산 유람. 가장 활발한 집필 활동을 했던 시기로 본다.

금강산과 송도를 유람하고 <유금강산기>를 지었다. 겨울에는 <스스로 읊다> 15 수로 김굉필을 비판하고, 점필재 김종직을 변호하는 글을 썼다. 그리고 성균관 유생들과 정여창 등의 성리학적 견해를 반박하는 논설 <심론>, <성론>을 지었다.


1482년(성종 13. 나이 29세) -죽림우사 결성. 벽서시 사건으로 그의 상소가 거론

봄에 홍유손. 이정은. 이총. 우선언. 한경기와 죽림우사를 결성(스스로 죽림칠현을 자처하고 청담파로 살아가기로 생각). 그해 윤 8월에 성균관 유생들의 '벽서시' 사건에 남효온의 4년 전 소릉 복위' 상소에 대해 거론되다.


1479년(성종 10. 나이 26세) -'조신'과 교유를 시작(남효온의 시문을 수집해서 '추강집'으로 엮는 작업을 했던 인물)

내시교관이었던 '조신'을 만나 교유를 시작했다. *그해 그는 영월로 내려갔던 것으로 보이며, 이총이 그를 전송해주었다. (*문제는 영월은 단종이 죽음을 맞이했던 장소였다는 것. 이 무렵 《육신전》을 창작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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